그레이스가 만난 의성
겨울 방학을 의성에서 보내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비교적 간단했다. 2학년 2학기, 나는 생각한 것보다 힘들고 지친 학기를 보냈고 간절하게 학교와 도시 생활의 ‘마침표’를 원했다. 분명 나는 학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닉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허겁지겁 수업을 간신히 따라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꿈과 열정과 성취를 향해 달려나가는 주변 친구들이 부러웠고, 각박하면서도 치열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치솟았다. 마지막 시험을 앞 둔 그 주말 무렵에 나는 로컬 임팩트 캠퍼스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게으름과 무기력을 핑계로 미루었던 전공 공부를 하느라 인생이 무미건조 했다. 하지만 그 공고를 보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해지면서 나의 삶에 잠시나마 색채가 돌아왔다. 어머니께서는 방학을 의성에서 과연 보내는 것이 너에게 충분한 의미가 될 지에 우려를 표하셨지만, 결국 나는 늘 그러했듯이 ‘끌리는대로’ 의성으로 향했다.
의성역에 내려서 숙소로 가는 길에 이승기의 ‘정신이 나갔었나봐’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활동에 지원을 하고 의성에 도착할 때 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의성에 도착을 해버리니까 덜커덕 겁도 나고 막연하기도 했다. 6주간의 생활을 내가 타지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버틸 수 있을까? 숙소에 들어가니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모여서 치킨을 먹고 있었는데 굉장히 마늘 맛이 강렬했다. 역시 의성이랄까..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웠지만, 그것보다 식탁을 둘러싸고 있는 어색한 공기가 더 무거웠다. 그 날은 비로소 이 활동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방에 들어가서 짐을 풀면서 룸메이트 언니랑 꽤나 깊으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나눴고 마음의 걱정이 조금 덜어졌다.
첫째 주에는 의성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팀을 짜서 현장관찰을 다녔는데 우리 팀에 의성 출신 오빠가 있어서 비교적 의성을 편하게 돌아다녔다. 현장관찰을 수행하면서 새로운 공간을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일상생활 속의 잔잔한 풍경으로 지나쳐 오던 것을 의식적으로 파헤치고 주목하는 작업은 현장 관찰이 지닌 매력이다. 나는 학과 특성상 현장관찰을 많이 수행했던지라 ‘현장관찰 자체는’ 새롭지는 않았지만, ‘의성이라는 곳 자체는’ 굉장히 신기했다. 고요하면서도 리드미컬하고, 횡량하면서도 따뜻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현장관찰이 끝나고 팀이 꾸려졌다. 나의 팀은 총 3명으로 그레이스(나), 에이든, 시소였다. 우리 팀은 문제 정의를 ‘노인들의 보청기 문제’로 잡았다. 에이든과 시소가 현장관찰 당시 공중보건의와 만나 면담을 했는데 이때 의성 내 어르신들이 보청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에이든과 시소는 현장관찰 당시 나와 같은 팀이 아니었다.) 나는 직전 학기에 과학기술학이라는 공부를 하면서 인간과 비인간(특히 과학기술)이 맺는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청기과 노인의 관계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우리 팀은 순조롭게 보청기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보청기에 대한 정보 수집은 쉽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의성 내에 보청기 관련 인프라는 굉장히 부족했다. 하나 있던 이비인후과는 망해서 안동으로 갔고 어르신들 대부분은 보청기를 의성이 아닌 안동, 대구에서 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안동으로 갔다.
안동은 보청기의 성지였다. 의료기기를 많이 파는 길거리로 가니까 곳곳마다 보청기 판매점들이 있었다. 우리는 세 곳을 방문하여 보청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실 굉장히 민망한 일이지만, 당시 우리는 몇 차례의 인터뷰 거절을 당하고,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인터뷰를 따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할머니를 위해 보청기를 구매하려는 효녀 손주 컨셉을 잡았다. 보청기에 대해 궁금해서 인터뷰를 한다고 하면 다들 경계 어린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할머니를 위해 보청기를 마련하기 위해 보청기에 대해 알아보는 손주들에게는 세상이 참으로 따뜻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활동이 끝나고 친할머니께 진지하게 청력검사와 보청기 착용에 대해 권유했고, 병원 예약까지 잡게 된 상황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보청기 판매점의 청능사, 청각사, 판매 사업주 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 갈피를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 뭔가 잡입 수사를 하는 기자가 된 느낌이라 내가 하는 행위에 있어 조금 찔리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 날 안동에서 의성으로 오는 버스에서 기분이 묘하게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언제 이런 것을 해보겠어!
우리는 보청기와 관련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의성 읍사무소의 복지과 공무원들과도 만나 면담을 진행했고, 안계면 찾아가는 보건복지팀의 공무원분과도 면담을 진행했다. 기존 행정 체제 내에서 보청기는 어떤 범주에 속하고 어떻게 관리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보청기를 사용 중인 어르신들을 찾아 뵈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비교적 가까운 철파리로 걸어 가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사납게 짖던 강아지와 소리를 지르던 닭들이 기억난다. 너네 아직도 그렇게 시끄럽니?
우리가 만나 뵈었던 어르신들은 보청기 사용 및 관리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셨다. 보청기는 어르신들께 너무나 어려운 ‘작고 복잡한 첨단 기계’였다. 어르신들은 보청기를 섬세하게 다루고 꾸준히 관리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청기와 관련한 애로 사항이나 질문들을 쉽게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주변에 누가 보청기를 끼는지 모르고 있었다. 마을 이장님들조차 마을 내 보청기 현황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다. 또한 어르신들은 보청기를 끼는 것을 허물로 인지하고 계셨다.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은 ‘늙음의 상징’이었고, ‘늙어서 죽을 때 다 된 사람이 백 만원이 넘어가는 고가의 보청기를 끼는 것’은 더더욱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우리가 버스 정류장에서, 시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보청기에 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르신들은 그렇게 마련한 보청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허물이라고 생각하시면서, 혼자 집에서 끙끙대며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다. 우리 팀은 보청기를 사용하는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보청기 문제’에 대해 몰입하고 공감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우리의 활동이 이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진정으로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프로토타입을 준비했다. 일명 ‘사랑의 보청기 센터’ 프로토타입이었다. 로컬 임팩트 캠퍼스 공간에 보청기 판매점의 사업주 분을 모셔서, 센터에 방문한 어르신들의 보청기를 수리해주고, 그 과정에서 보청기 사용 실태 조사를 진행하는 프로토타입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의성읍 내에 있는 보청기 판매점 사업주분과의 면담에 실패해 협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토타입을 준비할 무렵쯤 에이든이 혼자 보청기 판매점 사업주를 만나러 갔고, 그분과의 긴 대화를 통해 프로토타입 진행에 있어 도움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 솔루션을 발전시키면서 보청기 판매점 사업주분과 더욱 더 많이 교류하였고, 우리가 의성을 떠나기 직전에는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서 아구찜도 먹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의성읍 내 보청기 판매점 사업주 외에도 다양한 보청기 회사들에 컨택을 시도했고, 스타트업 회사의 직원분과 비대면 면담을, 스타키 계열사 보청기 회사의 대표님과는 대면으로 면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분들 도움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보청기에 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고, 프로토타입을 무사히 진행할 수 있었다.
2월 12일 토요일 장날에 대망의 프로토타입이 개시되었다. 총 11분이 사랑의 보청기 센터에 방문해주셨다. 내심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기를 기대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이상의 인원이 왔으면 시간 내에 모든 분들이 보청기 수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시소는 대기를 하고 있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보청기 사용 실태 조사 및 교육을 진행했고, 에이든은 보청기 판매점 사업주분을 도왔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었던 문제처럼 ‘비교적 사소한 이유로’ 보청기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못했다. 왼쪽 귀에 착용해야 하는 보청기를 오른쪽에 착용하고 계시거나, 더 깊숙이 귓속으로 보청기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는 등 ‘전문가 입장’에서는 간단한 이유들이었다. 우리는 프로토타입에서 얻은 어르신들에 대한 보청기 사용 정보와 보청기 고장의 원인을 정리하였고, 정리된 내용을 의성 군청의 자활 복지계에 전달했다.
그 뒤 우리는 최종적으로 우리가 정의한 ‘보청기 사용 및 관리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구체화시켰다. 의성 군청의 자활복지계 공무원분들과의 면담을 통해 의성군의 찾아가는 보건 복지 통합 서비스 차량과 보청기 문제를 연결시키는 방안으로 진행했다. 보청기를 어르신들 개인이 혼자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청기의 구매부터 사후 관리에 있어 군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으로 어르신들이 행복하고 건강한 노후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솔루션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과 사회적 임팩트를 보고서로 담아냈다. 보고서는 전반적으로 내가 담당했고, 에이든과 시소는 최종 발표회를 준비했고, 우리 팀은 둘 다를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의성에서 생활 한지 1~2주가 지났을 때 운영진인 파도가 나에게 이 활동이 어떤 의미를 남겼으면 좋겠냐고 물었었다. 그때의 나는 ‘이 활동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없어도 좋다’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어떠한 의미를 추구하고 찾기에는 지쳐 있었고, 또 그냥 이 생활 자체에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서 일명 ‘뇌를 뺀 상태로’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나의 이러한 ‘뇌를 뺀 상태’를 다른 러너는 나에게 배우고 싶은 지점으로 칭찬해주었지만, 사실 나는 그냥 너무 힘들었고 이 활동을 끝까지 종주하기 위해서는 컨디션 조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때는 활동에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임했고, 다른 러너들과의 관계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나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초기 태도는 어느 순간부터 전복되었다. 우선 우리가 포인트로 잡았던 문제인 ‘보청기’가 나에게는 너무 재밌는 주제였다. 그러다 보니 ‘적당히 해야지’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늘 욕심을 부리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생각해보니 에이든과 시소가 고생을 덩달아 많이 했다. 활동 초반에는 10시만 되면 나의 침실로 몰래 기어 들어가 적당히 핸드폰을 하다가 잤는데, 설날 휴가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거의 다 올라가는 새벽 1시까지 1층 공용 공간에서 다른 러너들이 수다를 떨고 놀았다. ‘집에 가고 싶다’라는 나의 상투적이면서도 장난스러운 표현이 아예 그친 것도 이 무렵쯤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이 활동이, 이 생활이 즐거웠나보다.
나는 로컬 임팩트 캠퍼스 활동의 끝에서,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나를 짓눌렀던 2학기의 우울함과 무기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침내 이번 해를 힘차게 구를 수 있는 에너지가 소생되었다. 로컬 임팩트 캠퍼스의 활동에서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은 나는 이 활동을 통해 내게 가장 필요했던 그것을 찾아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이들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의성에서의 6주는 짧지만 굉장히 길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