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희가 만난 의성
저는 말 그대로 의성에 도망쳐왔습니다. 졸업을 막 앞두고 모든 걸 버려둔 채 의성으로 도망치기로 했던 건, ‘시골’에 가면 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아동가족학과지만, 꿈을 찾아 계속 촬영 일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을 영상으로 구현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내가 생각한 나의 영상을 찍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을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볼까 하다가도 막상 무엇을 해야 할 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망설임에 익숙해져갈 때쯤, 친구가 로컬 임팩트 캠퍼스의 존재를 알려주었습니다. 쉬고는 싶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는 불안했던 저에게 로컬 임팩트 캠퍼스는 매력적인 도피처처럼 보였습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로 면접을 보고 짐을 싸고 버스를 예매했습니다. 그렇게 도피처인 의성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고, 길을 떠나오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도망가는 길, 버스 안에서 적어놓은 글이 있습니다. 그 일부를 여러분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서울을 떠나 의성으로 가는 길. 많은 생각이 듭니다. 평소와 다른 말씨로 글을 적는 이유는 누군가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좀 더 바지런히 글을 적기 위함이고, 어쩌면 정말로 누군가에게 이 글을 보여줄 때가 올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쳐있는 저를 달래기 위해 떠나는 이 여정이 정말 위로가 되어줄지 조금은 무겁고 조금은 설렙니다. 언젠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기대를 해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동안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지내왔는데,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어 기대해볼까 합니다. 한달 반 여의 시간을 낯선 곳에서 보내고 난 후, 제가 진짜 원하는 삶의 모습을 좀 더 명확히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요.
도망을 치는 길에 저런 생각을 했었나봅니다. 다행히도 저는 의성에서 저의 바람을 이룬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었으니까요.
도망을 치고 나면 그 다음은 쉬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도망쳐온 의성도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서울에서 일할 때만큼이나 열심히 살아야 했습니다. 새로운 인간관계에 적응하기 위해 마음을 써야 했고, 프로젝트를 위해 진행되는 강의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계속해서 로컬의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 돌아다니고, 매일 주어지는 해야 할 일들을 잘해내기 위해 잠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결과물에 대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의성에서의 시간은 참 행복했습니다. 분명 천국이 아닌 걸 알고 있었는데도, 쉬운 시간만 있었던 게 아님에도 말입니다.
의성에서의 시간이 행복했던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고향을 느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문제를 찾으며 만난 많은 사람들은 의성이 고향인 사람들이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하는 순간순간 그들이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점만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해도, 천국 같은 곳이 아니라고 해도, 다만 고향이기 때문에 의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저도 저만의 고향을 떠올렸습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의 뿌리가 있는 곳, 고향. 저의 고향은 공간이기도 했고, 기억이기도 했고,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고향을 떠올리며 나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저는 제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이미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성에서 제가 돌아갈 저의 고향을 떠올리며, 삶의 목표를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잊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성공한’ 삶이 아니라 ‘행복한’ 삶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 삶의 목적은 항상 저의 행복이었음을, 조금 더 나아가 세상의 행복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행복을 잘 캐내고 그것을 잘 나누며 살아가면 그걸로 된 거다. 꼭 무언가를 대단히 크게 이루어낸 특별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지 말자. 행복한 사람으로 살며 내실을 다지자. 다져낸 내실로 기회를 잡기도 하고 찾기도 하자. 의성에서의 나날들은 그렇게, 저에게 제가 잊어버렸던 것들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의성 또한 저의 고향이자 집이 되었습니다. 함께 사는 친구들은 식구가 되었고,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이웃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문제를 찾고, 그것을 파헤치고,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하는 과정에 모두가 함께 했다는 것, 함께하는 과정에서 문제에 대한 생각만 공유한 것이 아니라 일상을 나누기도 했다는 것, 우리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다는 것, 그런 것들이 무슨 영향을 끼치기는 했을 것이라는 사실만 확실할 뿐입니다.
언젠가 다시 고향을 떠올리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의성에서의 기억도 같이 떠오르게 되겠죠. 이제는 의성도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 나의 기억이 담긴 곳,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까요.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도 의성은 그런 곳일 겁니다. 그런 소중한 의성이 잘 간직되기를 바랍니다.
삶이 소풍이나 여행에 비유되는 이유는 떠돌며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저만의 여행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떠나는 길의 초입에 서서 의성에서의 기억, 로컬 임팩트 캠퍼스에서 배웠던 것들이 저의 뿌리가 되어 저를 단단히 지탱해줄 것임을 느낍니다. 떠돌다 지쳤을 때 돌아가 잠시 기댈 수 있는 소중한 곳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전보다 더 큰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향을 만들어 준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행복하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