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적 퇴직공무원> 17.
대학교 시절, 여름방학 동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방학이 끝나고 아르바이트가 끝났는데도, 한동안 직업병을 앓았다. 친구와 카페에 앉아 있다가 간혹 화장실이라도 가는 도중, 어디선가 "여기요!"하고 직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한다는 거다.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몸이 대답하려 했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는 백화점 8층 식당가에 있는 ⌜미미락⌟이란 일본식 우동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한동안 미미락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면, 테이블 위에 있는 그릇들을 차곡차곡 크기 순서에 따라 쌓아 놓았다. 그릇을 치울 누군가가 그대로 들고 가기만 하면 될 정도로. 손님인 내가 먹은 밥그릇을, 과거의 아르바이트생이었던 내가 튀어나와 치워 놓았다.
기상청 공채 시험에 한 번 떨어지고서는 서울로 갔다. 다음 시험이 있기 전까지 노량진역 건너편에 있는 KT 휴대전화 고객센터에서 7개월 간 일을 했는데, 직업병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도 모르는 내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목소리를 두고 10년 뒤 내 어린 조카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모, 전화받을 때 왜 목소리가 달라져?"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거기에 1+1처럼, 어느새 키보드를 두드리는 타자수도 눈부시게 빨라져 있었다.
10년 6개월. 기상청에서 일을 한 후 생긴 직업병은 조금 더 피곤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창밖으로 시정을 확인한다. 시정(視程)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최대 거리(가시거리)이다. 가시거리를 통해 공기가 깨끗한지, 미세먼지가 있는지 등을 확인하곤 하는데, 확인할 이유가 없어진 지금도 확인을 한다는 게 우습다.
시정이 좋지 않으면, 대기오염정보를 알려주는 앱을 연다. PM10과 PM2.5 농도를 확인한다. PM(Particulate Matter)는 먼지 입자를 말하는데, PM10은 먼지 입자의 직경이 1000분의 10mm, PM2.5는 직경이 1000분의 2.5mm보다 작다는 말이다.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확인하지는 않는다. 하늘이 찌뿌둥해 있거나 비가 올 것 같으면 그제야 일기예보 앱을 열어본다. 문제는, "응~ 오늘 오후부터 비가 온다네." 하고서 그대로 앱을 닫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비가 온다고?', '왜 오지?', '어디서 들어오지?', '얼마나 오려나?'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2분 간격으로 나오는 위성영상을 동영상으로 돌려본다. 한반도 영상만으로는 안 된다. 동아시아지역 영상까지 봐야 한다. 일기도도 들여다본다. 500 hPa(지상에서 약 5km 상공)에서부터 지상 일기도까지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린다. 수치예보모델 자료까지 샅샅이 보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으니, 다행인 거다. 그나마 이제 일기도도 보지 않는다. 아-주 가끔만 본다.
번개가 번쩍하면 번쩍했던 방향을 머릿속 동서남북 나침반 위에 표시하고, 뒤이어 천둥소리가 들릴 때까지 숫자를 센다.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면,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곳을 눈금자로 꾸욱 찔러보고 싶다. 적설량이 몇 cm이려나? 비가 세차게 쏟아지면, 그 시작과 끝이 너무 궁금해서 레이더 영상을 본다. 역시나 동영상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러고 있는 행동들, 몸에 배어버린 것들이다. 그것들이 나인 것 같고, 내 일부가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나도 이러는데, 30년 기상청에서 일하시다가 퇴직하신 선배님들 심정은 어떠할까, 처음으로 짐작해본다.
글을 쓰는 일을 하루 일과로 삼기 시작한 지 4년이 지나자, 새로운 직업병이 생긴다. 흘려들어도 좋을 얘기들을 이야기 소재로 쓰려고 자꾸 주머니 속에 주워 담는다. 대충 꺼내놓아도 좋을 말들을 스스로 자꾸 검열한다. 적절한 비유인지, 군더더기 표현은 없는지, 맞춤법은 맞는지. 가장 솔직하고 가장 품위 없이 써오던 일기마저도 최소한의 '글'이 되도록 써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쓰기가 귀찮아진다. 기가 막히게 재밌는 소설을 읽으며, 시점과 구조를 분석한다. 피곤하다. 그러면서도 경이롭다. 내가 점점 글쟁이가 되어가는 건가 싶어서. 아직 직업도 아니면서, 괜히 혼자서 직업병이라고 우긴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안에 흔적을 남긴다. 흔적들이 자꾸 쌓이고 쌓인다.
사람들의 흔적을 상상해본다.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신발이 눈에 들어올 테고, 보석 디자이너라면 사람들의 액세서리에 집중할 테고, 한의사라면 상대방의 안색을 먼저 보지 않을까. 머릿결과 헤어스타일을 보는 사람들, 속눈썹이나 손톱을 보는 사람들, 말투를 보는 사람들, 치아를 보는 사람들, 나무의 상태를 알아채는 사람들, 새의 울음소리를 구분하는 사람들, 전봇대의 얽힌 전깃줄을 보는 사람들, 자동차의 엔진 소리를 듣는 사람들, 빵을 먹으면서 재료의 비율을 가늠하는 사람들......
상상할수록, 내 삶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유일무이한 '나'이면서, 동시에 풀밭에 기어 다니는 숱한 개미들 중 한 마리 같다.
오늘도 개미 발자국 같은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 마음속으로는 코끼리 발자국처럼 멋진 흔적을 남기는 삶을 꿈꿔본다. 개미 발을 코끼리 발로 키울 수는 없고, 개미 발에 코끼리 신발을 신을 수는 없으니,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냥 '개미 발'을 '코끼리 발'이라 우기기로 한다. 얼토당토않은 상상으로, 오늘 내 삶이 코끼리의 발처럼 묵직해질 수 있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