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

난 그날 천운과 불운을 한 번에 가지게 되었다

by 살피

최악의 사고를 겪은 것치곤 평온한 표정의 딸이 내 앞에 서 있다. 딸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딸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둘은 눈을 맞추고 곧 정면을 주시했다. 아무 말도 없이, 숨소리도 없이 집으로 걸어갔다. 투박한 발걸음은 제 할 일을 다 하고 기능을 멈췄다. 집에 도착하니 창밖의 해는 이미 잠에 들고 있었다. 딸은 곧 방으로 향했다. 나는 딸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부드러운 투로 물었다. “정말 상담 안 받아도 돼?” 큰 사고를 겪은 딸을 위해 정신과 상담까지 알아봤다. 하지만 돌아온 딸의 대답은 이랬다. “필요 없어.” 짧고 굵은 한마디였다. 필요 없다는 말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

딸의 실질적 보호자는 내가 아니었다. 나도 내가 보호자의 자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변명을 해보자면 일이 너무 바빴고 전혀 딸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이를 처음 가졌을 땐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이를 괜히 낳은 것 같았다. 이런 세상을 경험하게 될 아이가 불쌍했다. 그렇게 새 아이가 생겼다는 것도 임신 이주 전에 알게 되었다. 난 갑작스레 아이 두 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포기했다.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하는 일을 찾아봤다. 얼마 뒤 나는 XX상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딸들을 방치하듯 집에 내버려 두고 직장으로 출근했다.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꽤 에너지 소모가 심했다. 감정을 모두 쏟고 나니 퇴근길에선 멍하니 가야 할 길만 바라보며 걸었다. 그날은 내가 직장에 나가지 않은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쉬는 날이었다. 딸들에겐 알리지 않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만나기로 한 친구네 집 앞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렇게 하루 종일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하루 종일. 내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까지.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하루 종일 꺼두었던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XX상가 붕괴 참사... 70여 명 사망’ 난 그날 천운과 불운을 한 번에 가지게 되었다.

딸을 키운 건 내가 아니라 큰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와 보낸 시간보다 큰딸과 보낸 시간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딸이 큰딸을 매우 신뢰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난 무책임하게 딸을 큰딸에게 맡겼다. 큰딸의 부담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날에 큰딸이 죽었다. 딸들이 손을 잡고 나를 만나러 왔다는 건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큰딸에게 불운을 짊어지게 한 걸까. 나의 불운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큰딸이 죽었다고 해서 내가 죽을 만큼 힘들진 않았다. 사고가 난 후 살아 숨 쉬고 있는 딸도 큰딸의 죽음을 실감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딸은 여전히 큰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감히 큰딸을 그리워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그저 큰딸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딸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딸의 이상 행동은 계속되었다. 반찬이 몇 개 안 되는 식사를 하다가 딸은 어쩐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밥이 입에 안 맞는 걸까? 딸은 밥을 먹다 말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외로운 식사를 했다. 혼자 먹는 밥은 익숙했지만 딸이 나를 거부한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한밤이 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딸의 방문에 귀를 댔다. 그리고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숨죽여 들었다. 딸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언니는 엄마를 용서하고 싶어 했잖아. 근데 난 도저히 용서 못 하겠어. 언니가 아픈 걸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엄마야?” 딸은 울분이 섞인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보고 싶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시간은 흘러갔다. 딸은 더 이상 나를 엄마로 인식하지 않았다. 난 딸에게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딸들에게 애정을 가지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 내가 딸들을 떠날 때 서로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딸들에게 변명거리가 되었고 난 정말 나쁜 엄마로서 자리 잡아버렸다. 큰딸의 죽음을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큰딸과 딸만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가족이었다. 딸은 성인이 되어 집을 나가버렸다. 집에 남아 있는 큰딸의 유품을 전부 가지고 갔다. 저만큼의 물건을 두고 지낼 곳이 있을까. 이젠 남이 되어버린 딸을 걱정하는 건 우스운 짓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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