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아니니까 그렇지
슬리퍼가 바다에 빠졌다. 너는 수면에 몸을 맡기는 슬리퍼를 바라보기만 했다. 왼쪽 발이 시릴 텐데, 굽이 맞지 않아 절뚝거리며 모래를 헤집는 네가 웃겼다. 나는 바다에 들어가 슬리퍼를 구하려다 말았다. 파도가 세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금방 나와서 다행히 몸은 젖지 않았다. 곧 슬리퍼는 스크린을 치고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크린이 슬리퍼에 맞고 금이 갔다. 뭐 저리 약해. 나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건만 너는 내 목소리를 들었나 보다. 진짜가 아니니까 그렇지. 나는 네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이곳에서 나가려고 한 지 몇 주가 지났다. 저 바다에 끝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가 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높이 솟아오르지도 않은 풍경만 반복되었다. 그리 성능이 좋지 않은 스크린인 건지 항상 노이즈가 껴서 우리의 몰입은 금방 김이 식었다. 너는 바다에서 나가고 싶다고 스크린 밖에 있을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지만, 더 커진 파도 소리에 묻혀버렸다. 배경이라도 바꿔줘요! 울음 섞인 비명을 지르니 스크린이 조금씩 바뀌는 듯했다. 수평선이 선명해졌고 곧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파도도 사라지고, 모래도 사라지고, 바람과 슬리퍼도 사라졌다.
우리를 감싸고 있던 사면이 무너졌다. 먼지가 날리거나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나는 네 손을 잡고, 너는 내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조심스러운 발자국이 하나둘 우리의 뒤로 찍혔다. 저 멀리 검은 네모가 보였다. 그 네모는 빛을 내고 있었다. 빛은 어두웠고, 우리를 비추는 것만 같았다. 홀린 듯이 다가가니 고양이도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작은 문이었다. 너는 새로 변했다. 내 손을 놓고 힘차게 날갯짓했다. 나는 문으로 들어가는 작은 새를 눈으로 좇았다. 하루가 지나고 새는 다시 돌아와 내 팔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도?
전혀.
조잘거리는 새소리를 들으니 무력해졌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새는 다시 너로 돌아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나는 네 손을 놓고 나비로 변했다. 하얀 잔상처럼 네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그리곤 이내 검은 네모로 들어갔다. 통로는 점점 넓어졌다. 중간부터는 사람의 모양새로 다녀도 괜찮을 듯했다. 나는 여전히 나비인 채로 계속해서 날아갔다. 끝이 없었다.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라 탁 트인 풍경이었을 뿐인데, 어째서. 쉬지 않고 날개를 움직이다 보니 어딘가에 도착했다. 나는 지금 꽃 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