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흔들이며 피어나다.
멈추지 않는 삶의 경제학
가을바람이 서서히 스며들어야 할 시기인데,
이상하게도 올해는 때 아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도 아닌데 며칠째 이어진 연중비.
창밖의 빗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릴 때마다
시간도, 마음도 함께 느려졌다.
긴 추석 연휴로 생체리듬은 어긋났고,
배는 고향 밥상으로 인해 제법 볼록해졌다.
하지만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이토록 실감 난 해도 드물었다.
먹고, 자고, 웃고, 이야기하는 단순한 시간.
그 단순함이 주는 충만함이 좋았다.
예전 같으면 화투패를 섞으며
누가 오래 앉아 버티는지 겨루었을 테지만,
이제는 세대가 바뀌었다.
귀여운 손녀딸과 아이가 함께 앉아
“아빠, 이거 알아요?” 하며 꺼낸 것은
바로 부루마블이었다.
색이 바랜 보드판을 펼치고
낡은 주사위를 손에 쥐는 순간,
한가위의 저녁이 다시 천천히 살아났다.
주사위가 굴러가고, 웃음이 번지고,
세대의 간격이 잠시 잊혔다.
그 한 판 안에 시간이, 가족이, 인생이 들어 있었다.
작은 경제학의 시작
첫 판에서 딸아이는 운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세금과 벌금, 그리고 무인도였다.
결국 게임은 통곡의 눈물로 끝났다.
아이의 그 서러움을 달래주기 위해 한 판을 더 하기로 했다. 다만, 이번엔 조건을 달았다.
“이번엔 부잣집에서 태어난 걸로 하자.”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처음부터 서울을 주었고, 게임머니는 몰래 몇 장을 더 넣줬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앞선 6살의 아이는 주사위가 던져질 때마다 환호했다.
도파민의 불빛이 그 작은 눈동자 안에서 반짝였다.
그날 밤, 세상은 아이의 웃음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부루마블 판을 들고 온 아이가 말했다.
“아빠, 나 이제 항상 부잣집에서 시작할래.”
그 말이 유난히 깊게 박혔다.
아이의 말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현듯 다시 느끼게 했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인생 게임도
출발선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
누군가는 서울에서 시작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출발점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오천만 명의 삶,
그리고 전 세계 수억 명의 인생이
하나의 보드판 위에서 굴러간다.
누군가는 부자가 되어 건물을 세우고,
누군가는 무인도와 벌금 사이를 오간다.
그리고 이제는,
“차라리 무인도에만 있고 싶다”
라는 말이 농담이 아닌 진심이 되어버렸다.
현실은 게임 오버가 없기에
패배자에게는 ‘기본소득’이 주어지고,
승자들은 ‘황금열쇠’를 독점한 채 룰을 바꾸지 않는다.
모두가 똑똑해졌지만, 그만큼 더 냉정해졌다.
이 잘못된 게임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게임을 잘 이해하게 된 걸까.
멈춘 자와 다시 던지는 자
게임이 끝나고,
보드 위엔 낡은 지폐와 말 몇 개만 남았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맑았고,
창밖에는 가을비가 조용히 내렸다.
나는 잠시 그 판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뚜껑을 덮었다.
마치 세상의 축소판을 덮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부루마블을 살고 있다.
누군가는 서울에서, 누군가는 무인도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출발점에서
주사위를 쥔 채 망설이고 있다.
세상은 이상할 만큼
‘멈춰 있는 사람’을 안심시키고,
‘굴리려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리스크를 감수하는 자에겐 비난이 따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겐 위로가 주어진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점점
굴리지 않는 법을 배워왔다.
그러나 그날,
아이의 작은 손이 다시 주사위를 굴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 게임에서 진짜 패배는
돈이 없는 것도, 서울을 갖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 두려움을 가지는 것
두려움에 멈춰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히 이 판 안에 가두는 감옥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주사위를 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이야말로 이 게임에서 영원히 갇히는 것이다.”
“Do not fear”
그리고 그 말은,
아마도 내 아이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