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의 죽음
비가 온다. 9살인 나는 우산을 쓴 채 검은 봉지에 두부를 들고 처벅처벅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빗 바랜 낡은 우산은 내가 걸을 때마다 한 번씩 휘청이고 있었고, 슬리퍼는 큰 탓에 벗겨질 듯 발이 미끈거린다. 거기다 안간힘을 써도 우산은 쓴 것인지 안 쓴 것인지 비를 다 맞으며 나는 걷고 있었다. 걷는 길의 골목은 한 구역 한 구역 돌아설 때마다 왠지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있어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래도 골목을 세, 네 번은 꺾어야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뭔가 비 오는 날에 관조적이던 좁은 골목들. 갑자기 사람이 지나간다면 영혼을 본 것처럼 소리를 먹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조금은 얄궂은 상상의 나래를 펴며, 굳은 모습이 되어 집으로 가는 심부름 길이었다.
그런데 그날, 한 귀퉁이에 누가 버렸는지 모를 쥐 잡는 찍찍이 덫이 나와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게 중요해?' 하며 신경 쓰지 않으려 했고, 보통의 날이었으면 지나쳤을 호기심. 하지만 가슴은 두근거렸고, 그날은 괜스레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졌다. 그 호기심의 배짱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더니 입을 틀어막게 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참새가 걸려 붙어있는 것을 본 것이다. 참새는 살기 위해 '푸드덕푸드덕' 날갯짓에 몸부림쳤고, 놔두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순간, 얼굴이 하얘지고 '어떡하지'하는 소리를 연신 속으로 남발했다. 그럴수록 나의 생각은 참새가 그 찍찍이에서 점차 말려 들어가는 것 같다. 본능적인 참새의 생의 의지, 스멀스멀 슬픔이 밀려온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뚝뚝, 비와 함께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참새를 떼어 구하기엔 생명이 달린 일이라 참새의 생사고락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결국 갈등 끝에 나의 부들거리는 손은 그 찍찍이로 향하고. 그리고 살포시 그 참새를 떼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심스럽고 조심스럽게 찍찍이 옆을 발로 밟아가며. 하지만 참새를 구한답시고, 떼어내고 난 깃털의 모습은 흉물스럽게 변해 있었다. 나는 눌러앉은 동정심에 울상이 되어 결국 집으로 새를 데려왔다. 집 안에 들어서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심부름 갔다 왔어요!" 하고 두부를 부엌 싱크대에 내려놓고, 참새를 몰래 방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연필이 있는 작은 박스를 비우고 손수건을 깔고 솜을 베개 삼아 참새를 넣었다. 참새의 처연한 눈빛, 버둥거리는 모습, 참새를 볼 때면 불운한 모습의 한 생명을 바라보는 듯하다. 나는 컵에 물을 담아와 나뭇 젓가락으로 입에다 물을 주고 일단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꽉 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계속하니, 그 기도는 그날 종일 달리기를 수십 번 지치지도 않았다. 그러다 어둑한 저녁이 되어 불을 끄고 잠을 청한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침까지 참새에게 턱없는 돌팔이 치료를 감행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엄벙덤벙 다해보는 것이다. 기껏해야 말도 안 되는 빨간약을 바르는 것이 다였다. 그래서 그런지 예상대로 참새는 무면허 시술이 도움이 안 된다는 듯 귀에 쏙쏙 들어오는 찢어지는 울음을 서럽게 울어댔다. 나는 콧등이 시큰거림을 느끼며 참새를 지켜 바라보는 것 외에 그다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마침내, 하루를 버티며 울어대는 참새는 그대로 죽어버리고, 나는 살릴 수 없었다는 생각에 회오리 같은 슬픔을 경험했다. 실의에 빠진 나는 학교에 가서 친한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다. 그러나 친구는 내게 뜻밖으로 "쥐면 내버려 둬도 괜찮고 참새는 불쌍한 거야?"라고 말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맞받아졌지만, 어물쩡거린 것이 분명했고 그 뒤로 말을 잊지 못하고 시무룩해졌다. 마치 그 말에 뒤통수를 휘갈겨 맞은 듯한.
이 일로 가끔 생명의 높낮이에 대한 질문이 치고 들어올 때 결론을 내리기도 힘들 때가 있다. 뭔가 그 물음은 생명의 기본 논제를 들켜버린 듯한. 무턱대고 생사가 참새였기에 슬펐을까, 모든 생명은 생의 의지가 있다는 출발점에 서면 죽어도 되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는 것이기에.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 대한 해와 이익으로 생명의 경중(輕重)이 분류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또 그 규칙을 훈련하고, 노출된 생명의 허용 덕분에 건강과 존엄을 지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 간혹, 나는 이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한 번쯤 이렇게나 많은 존재를 우주는 어떻게 대하고 움직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우주가 '상쇄되기 위한 하나의 일원들이야, 생명과 물질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무(無)로 남는 것뿐이란다, 이분법처럼 생각하지 마.'라고 우주가 말할 것만 같고, 그러면 나는 배운 영혼의 무게를 언급하며 "영혼이 있는 인간은 경의로와요! 그래서 인간은 최소한 자신의 영역 안, 생명 가치를 생각해야만 한다고요"라고 답이 탑재되어 막무가내 대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생명을 놓고 무얼 버리고 무얼 선택할 때, 인간이 정하고 굳힌 선택지가 항상 먼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친구가 질문한 말에 수십 년간 망설이던 답변은 "너 의견도 좋아, 그런데 나는 참새라서 구하려던 것이 맞아!"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였던 것 같다. 이 의견은 동의를 구할 필요보다 솔직한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건 매사 타인에게 기대치를 괜스레 높여 동참하길 바라는 심정을 내려놓으며. 아무래도 동조를 바라는 의연 중의 내심이 있었던 탓이다. 그러면 그 만족도를 높일수록 저항에 부딪힐 확률도 높다. 그러니 누구나 생각의 선언은 이채롭기에, 그것이 맞고 그른 것은 삶의 질주 본능에서 스스로 알아가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참새의 생명을 놓친 경험을 안타깝다, 여긴 심장의 울림. 그 울림을 나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하지만 손이 닿지 못하는 사(死)에 대해 앞으로 유연하게 대처하길. 그것은 나를 벗어나는 자연과 우주의 영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