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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형 통증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

by 양다경

결과의 부산물. 그 부산물은 화살의 방향처럼 정확히 예측할 수가 없었던 시간들이고, 시작과 동시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에게로 펼쳐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 되었다.



​​이 일은 서사도 없는 너무나 단순한 일로 시작되었다. '이'가 쏟아지는 열병처럼 내리 아팠고, 그래서 치과에 어기적어기적 걸어 찾아간 날. 그리고 치과에 가니 '이'는 곪아 있었고, 며칠에 걸려 신경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여기까지 평범하고 보편적인, 누구에게도 있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이'치료. 그러나 나는 여태껏 받은 신경치료 중, 경험하지 못한 찍어 올리는 아픔에 '윽', 하는 탄성을 연발했다. 원래 신경치료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고, 그 고통은 쉽지 않아도 제법 견뎠던 나였기에 휘몰아치는 전율은 사뭇 달랐던 공포의 예고였다. 왠지 귀 쪽으로까지 소스라친, 목 뒤편까지 저려온 묵직함의 끝장. 하소연하니 의사 선생님은 '이'치료가 끝나면 없어질 통증이라고 설명을 해주셨다. 믿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고, 나도 이 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는, '이' 관리에 소홀했다는 자책을 남겨두고, 모든 의심의 고리를 접었다.

​하지만 생각하고는 다르게 집에 와서도 잇몸 바깥, 안쪽에 전기 침이 꽂혀 사방을 미는 듯한. 귀까지 올라오는 통증은 오른쪽 뺨 전부를 통제했다. 그건 온몸을 깊숙이 말아 넣고 말아 넣어도 아프고 아파졌다. 나는 병원이 열리는 시각, 저절로 몸을 일으키며 매일같이 치과를 찾아갔다. 일단은 신경치료를 끝내는 것이 '수'라는 생각이 들었고, 선생님도 마찬가지 의견이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명예스러운 통증은 아팠던 이와 주변 이를 뽑아내도 기세등등하게 나를 더욱더 압박했다. 그러니 사진을 찍고 확인하는 일이 계속 행해졌고. 행해져도 '이' 주변에는 아무런 증상의 발현을 찾을 수 없다는 한결같은 결론. 그러니 의사 선생님도 심적 부담이 되었고, 나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슬슬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건 그 미세한 원인을 찾으려 노력하시는 선생님의 진땀 하고는 다른, 고통이 끝날 수 없다는 돌발 상황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새로 받아보고 싶은, 여러 의견의 수렴도 절실했다. 그래서 자칫 그 꾀병처럼 보일 수 있는 고초를 병원마다 반복 재생하며 토로하고 다녔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사진에 이상이 없고 보기엔 멀쩡한 듯 하기에 내게 의문을 가지는 병원이 많았던 탓에 점점 감정적 부담이 누적 대고. 그러니 성난 거미의 통증 그물망은 내 정신을 조여 오고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치료로 신경이 자극을 받아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설명하는 얘기가 나와 가족들을 겨우 납득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제법 큰 병원의 신경외과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하라는 검사는 다하고, 근전도 검사와 MRI 검사까지 거쳤다. 이제 '이'가 아니라 삼차신경통을 비롯 뇌질환 쪽으로도 의심을 해보는 것이다. 결과는 감사하게도 뇌 쪽으로는 이상이 없었지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원인은 없었으니. 아픔이 개선될 거라는 희망은 이제 완전히 떠나는 듯했다. 그러자 신경외과 의사 선생님이 반대편의 마취통증의학과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급히 남편과 함께 그곳에서 빠져나와 마취통증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번호표를 집어 들고 남편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때, 남편의 전화가 내 깊은 심연의 괴로움처럼 구슬프게 길게도 울린다. 아마도 나의 상태의 진전을 알고자 아이들이 전화를 한 것이 분명했다. 남편은 주변에 불편함을 줄까, 자리를 뜨고. ​혼자가 된 나는 오락가락 통증이 오면 숨을 참다, 느렸다 하고 있었다. 문득 여태 안 하던 별의별 정신적 고문이 행해진다. '죄가 많았다, 앙갚음이 시작되었다.' ​그 생각에 육체가 정신을 거의 다 도려낼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시 눈을 옆으로 돌리니 얼핏 보기에, 백설기 피부에 하얗고 고운 주름의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왔다. 그분은 낯가림도 없는 듯, 바짝 옆자리에 걸터앉더니 나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동태를 살피셨다. 나는 아픈 곳을 쥐어짜고 있는 상태라 할머니를 무심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훑던 내 얼굴에서 시선이 내 신발로 옮겨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의 말을 내게 던졌다."처자 신발 이쁘네. 그 신발 메이크요?" 하고 묻는다. 나는 " 네?" 하고 말문을 주춤거렸다. "메이크 아니에요……."라고 아파서 골을 싸매는 중에도 반사적으로 답이 나왔다. "이왕이면 한 번씩은 비싼 거 사 신어요. 아파보면 너무 아끼는 것도 소용없는 거라." 할머니는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고통에 머리가 쭈뼛거리니, 할머니에게 온전히 눈길을 줄 수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상관없는지, 무심히 고개를 떨구며 툭, 툭 말을 건넸다. "나는 어깨관절을 수술했어요. 근데 치료가 마무리됐다, 하는데… 내 한번 통증이 오면 뒹군다, 얼매나 아픈지……." 할머니는 자문자답식의 말을 열거하셨다. 나는 그 말씀에 왠지 나도 그런 후유증의 상태가 될까 두렵고 겁이 덜컥 났다. 그런데 이 얘기를 경청하던 맞은편 아저씨가 고개를 내밀고 넋두리를 풀어놓는다.
"여기 오는 분들 고통이 다 그래요, 내도 손가락 수술한 지가 언젠데, 아직 이상이 있는 것처럼 아파. 아파서 긁는 버릇이 있어, 환상통 아닌가 하는데. 나는 아픈데 어떻게요, 여기 봐봐요, 벌개요."

아저씨는 잘린 뭉뚝한 손가락 두 개를 박박 긁었다. 그리고 상처로 뭉친 보랏빛 핏줄을 보란 듯이 쭈욱 내밀었다."아프면 딱 죽여달라는 소리가 나와, 내 그 심정 알지, 여기가 답답한 심정으로 오니." 아저씨는 나와 할머니를 번갈아 보면서 '당신들 마음이 내 마음이야' 하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갔다."나는 통증을 이기려고 힘든 일을 더 한다니까, 이 손으로 일 다해, 밤 되면 곯아떨어져 자고, 투정할 겨를도 없어." 아저씨는 말하면서도 잘린 손가락을 바쁘게 문지르며 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에 시선을 가져갔다.

"아이고 어째, 고생이 많아" ​할머니는 아저씨의 말이 납득이 되는지 수심이 찬 얼굴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그랴도 죽진 못하고, 내 손주를 보고 사는데. 우리 손주는 매일 안부전화를 해, 걱정을 그렇게 하고, 식사 꼭 챙겨 먹으라고 하네." 할머니는 말을 하면서도 손주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 미소가 나와, 입을 다물다, 열다 했다.

​"하하 그럼요, 암요, 저는 우리 아들 땜에 살아요, 군대 갔다 와서 용돈을 다 주네, 그럴 땐 고통도 덜하다니까, 하하" 아저씨도 질세라 말을 덧붙이고, 말을 끝내자마자 말끝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할머니는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그려요, 사는 게 울다 웃다, 웃다 울다 헌다 아이니껴" 하며 아련한 눈빛이 되어 헛웃음을 내비치셨다. 그 후 짧은 몇 분 동안, 대화의 주를 잇는 소재가 비극에서 희극으로 희극에서 비극으로 극 전환이 왔다 갔다, 하며. 나는 고통과 씨름 중에도 뭔가 공감되는 심정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묵묵히 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화를 끝낸 남편이 오고, "애들이 엄마 걱정을 엄청 많이 해"라는 말을 하니, 나는 문득 애들에게 걱정을 끼친 미안한 마음이 커져 할 말을 잊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양다경 씨"그제야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서, 대화하던 분들께 가벼운 인사치레를 하고, 남편과 진찰실로 들어갔다. 마취통증의학과에선 다소 심각한 표정의 선생님이 내 얼굴 부위를 초음파, 찍은 뇌 사진으로 여러 차례 시선을 옮겨 고심과 함께 치료를 시작했다. 목과 얼굴로 귀로 통하는 신경치료 겸 차단을 위해 목에 긴 주사를 놓는다고 하셨다. 이어 그 큰 주사는 내 목 언저리로 깊게 들어오고, 쓴 약물을 퍼트려 두 눈에 핏줄이 서고 충혈을 일으켰다. 뭔가 맞으니 그나마 통증이 줄어드는 것도 같다. 동시에 어지러움을 느껴 눈을 감고, 눈을 감았다 뜨니 어지러움이 한결 나은 상태였다. 이 시술은 상황을 보고 계속해야 한다길래, 다음번 시술을 예약하고 치료실에서 밖으로 비틀대며 나왔다. 남편은 비틀대는 나를 무거운 얼굴로 잽싸게 좌우로 받치며, "괜찮아?" 했다. 서로를 위한 다짐인지, 서로를 위한 맹세인지, 묻는 남편의 말이 함께 할 치료의 의지를 어필하는 듯도 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예상하지도 못한 파장에 노심초사하는 얼굴이 역력했다.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괜찮을 거야, 여보! 나을 거야!" 하는 남편의 위로의 말을 계속 들을 수 있었다."자기가 안 아프니까, 그렇게 말하지!" 하며 평소 같으면 쏘아붙이는 말이 나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해주는 말과 아이들의 걱정이 통증에 홀로 선 나를 구출해, 엎고 뛰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가족이니 나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려 하는 것이 아닌가."고마워~ 그런 말 해줘서, 난 견딜 수 있어!" 여느 때와 다르게 팔불출이 된 남편에게 그의 근심의 그늘을 걷어주길 위한 말을 건넸다. "좀 나아! 나았어? 주사가 효과가 있네! 있었어!" 남편은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광신도 같은 믿음으로 내 말에 기뻐하고, 낫길 열망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내가 겪고 있는 일을 자신의 일이라 마음 새겨 극복의 결속을 다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생활에 파고든 통증이 세어져도, 우울의 독버섯만은, 가족으로 통해 뭉개지고 조각날지도 모른다. 결국 가족들도 아파하는 나와 함께 하는 일상이 될 수밖에 없기에. 나는 병원에서 만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의 대화 덕분에 통증, 그 이야기의 블라인드를 걷었다. '사는 것은 울고 웃는 거라는' 말이 맴돌며. 나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있을 법한, 그 억울한 벽을 우리는 매번 마주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리 얘기해 주지 않는 인생의 고통과 아픔, 그 넘기 힘든 벽에서 거래의 타협점을 찾고 있을까.

​지금도 그 거래의 중심에서 이전보다 더 수고로운 여정이 되고 있는 환우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가슴 깊이 응원하고 응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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