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의 우정
칙칙폭폭, 매섭게 들어오며 굉음으로 자신을 알리는 열차, 윤곽을 드러내며 철도 근처에 사는 12살 미란과 윤희를 깨운다. 특이나 미란의 집은 안방 창문을 열면 철도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환하게 보였으니. 그 탓에 그녀에게 부쩍 요란한 알림음처럼 들리는 기차소리다. 그래서 미란은 가끔 윤희를 불러 창문을 열고, 연이어 들어오는 열차를 구경하기도 했는데. 구경하면 지나가는 열차 속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며. 그러면 둘은 수줍은 듯 고개를 푹 숙인다. 숙이다 피어오르는 호기심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그러다 3단 서랍장을 딛고 창문을 넘어 기찻길로 나가기도 했다. 나가면 기찻길 옆 무성한 풀과 자유분방한 야생화들. 그 자연에 녹아들며 기찻길을 따라 나란히 거니는 미란과 윤희. 기적소리를 내고 열차가 오면 그들은 빠르게 피해 철도 담벼락에 숨어들기도 했다. 그러다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드는 둘은 깨알 같은 웃음을 쏟아내며. 그건 여간 긴장감과 희열이 넘치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기찻길 밑으로 하루가 다르게 크는 쑥 넝쿨 똬리들. 둘은 쑥을 좋아하는 탓에 널브러진 쑥을 뜯기도 하며. 그러면 윤희와 미란은 호주머니에 쑥을 가득 담아 햇살과 같은 미소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건 틈만 나면 행해지는 일과로 미란이 먼저 "기찻길에 가자!!"라고 말하고. 그럴 때마다 윤희도 "좋아!!" 하며 명쾌히 따라나선다. 그렇게 철도 근처에 살았던 미란과 윤희는 가끔 미란의 집 방 창문으로 기찻길 주변을 들락날락하며 놀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미란의 아버지 수철과 윤희의 어머니 소연이 사귄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했다. 그리고 둘이 재혼할지 모른다는 수군거림이 퍼지고. 사실 그 말은 진실에 가까웠다. 수철은 미란, 소연은 윤희. 둘 다 딸 하나 키우며 혼자 살고 있었는데. 미란의 아버지 수철은 사별이었고, 윤희의 어머니 소연은 남편의 폭력으로 윤희를 데리고 나온 상태였다. 그래서 그 후, 소연이 정식으로 이혼이 된 시점에서 그동안 알고 지냈던 수철과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다. 윤희는 두부가게 아주머니에게 그 소식을 듣고, 썩 달갑지 않더니 슬며시 불안감이 솟구쳤다. 어른들의 일이지만 막상 엄마, 소연이 미란의 아버지 수철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 껄끄럽기 그지없고. 그럼 미란과 가족이 되는 것인데, 윤희는 마치 친구, 미란에게 엄마를 뺏길 것 같은 온통 거북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 소식이 들린 얼마 후, 윤희의 엄마 소연은 남몰래 문구점에서 미란에게 공책도 사주고 연필을 사주며 환심을 끌고 있었다. 그러니 미란은 새엄마가 생긴 것이 기쁜지 화색이 만연하다. 윤희는 학교 가는 길, 입을 꾹 닫고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지켜보자 점점 미움이 가중되고 마음이 일그러졌다. 그러니 갑자기 미란이 꼴 보기 싫어 더욱 속이 뭉그러지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 미움은 점점 커져 어느새 분노의 싹이 되어 윤희의 생각을 빼곡히 채우게 된다. 그러니 뒤쫓는 악의성은 미란이 세상에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래서 저무는 봄의 어느 주말 오후, 수철과 소연이 약속을 하고 데이트를 간 날, 윤희는 방구석 모퉁이에서 무언가 생각에 매몰되더니 혀를 끌끌 차며
"쯧쯧 불쌍하지만 하는 수 없어..." 하며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혼자 있는 미란의 집으로 가서 함께 기찻길을 가자고 조르는데. 미란은 늦은 오후라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윤희가 한사코 조르니 하는 수없이 함께 안방 창문을 넘었다.
그리고 둘은 기찻길에 이르러 걷기 시작하고. 그러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인 윤희가 입을 달싹거리다 미란에게 묻는데.
"너 우리 엄마가 좋아? 너의 아빠랑 우리 엄마 결혼할 거라잖아, "
"응... 너의 엄마 굉장히 좋으신 분인 것 같아, 난 좋아~!" 하고 미란이 고개를 들고 뻣뻣하게 답했다. 그러니 윤희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을락푸를락했다. 그리고 눈에 질투의 독기가 차오른다. 그때쯤 기찻길로 칙칙폭폭 하며 기차가 오는 경적음이 들리고.
여느 때처럼 기차 소리에 기찻길에서 멀어질 움직임을 보이는 미란.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움직임을 보는 윤희는 표독스러운 눈을 하더니 그녀의 팔을 확 잡아 낚아채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여기서 그냥 기차 보자, 보자!!" 윤희가 서슬이 퍼런 눈으로 미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너무 가까워, 여긴 너무 위험해.." 하고 말하는 미란의 눈동자에 불안이 실린다. 윤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더욱 세게 팔을 붙잡는데. "여기서 보는 것도 재밌어~!" 하며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때 기차는 '칙칙 뿜뿜' 하는 정적을 다시 연달아 울리고, 그들 쪽으로 방향을 지으며 달려온다. 미란은 윤희가 자신의 팔을 잡고 놓지 않자, 순식간에 바들바들 떠는데. 윤희는 그런 그녀를 보고 "하하 하하 하하 여기서 보면 정말 재밌다니까!" 하며 웃기 시작하고. 그때였다. 윤희는 선로로 기차가 가까이 들어오자, 온몸의 힘으로 미란을 기찻길로 밀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힘껏 달려 철도 담벼락으로 피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윤희의 돌발행동에 미란은 기찻길로 철퍼덕 넘어지고. 그리고 그대로 '윽' 하는 그녀의 비명이 하늘을 찌르며. 몸은 기차에 바스러져 사방은 피로 덮여 나갔다. 윤희는 그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엄마야! 네 엄마 아니야!!" 하며 뒤돌아서 뜨거운 햇살과 풀숲 사이로 뛰어갔다.
그 후, 딸이 기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미란의 아버지 수철. 그는 딸을 잃은 슬픔에 술을 매일같이 하루 종일 마셨다. 엄마 없이 애틋하게 키우던 미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이것저것 보약도 많이 먹이고 키웠더랬다. 그런데 철도 옆에 살면서 시끄럽다, 투정도 한번 안 부린 착한 딸이 기차에 온몸이 짓이겨 죽다니. 수철은 미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보통 마음이 힘든 것이 아니다. 몇 날 며칠을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망연자실하고, 가끔은 집에 머무는 어두운 미란의 환영을 보기도 했다. 그러니 수철은 자식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나무라며 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행색이 초라해지며. 끝끝내 집에서 목을 매 자살하게 되는데.
이 소식은 마을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고, 윤희의 엄마 소연에게도 엄청난 충격과 좌절감이 된다. 수철은 전 남편과 달리 자신에게 자상하기 그지없었기에. 어쩌면 첫사랑과 같은 운명적 사랑이었다고 소연은 생각했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라는 그녀.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러니 그가 죽고 난 후, 소연도 알 수 없는 병마에 시달렸다. 어느새 일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시름시름 앓게 되는데. 윤희는 엄마 소연까지 아프자, 자신이 한 일이 점차 불안해져 방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선명하게 남은 그날, 미란과의 일. 윤희는 눈을 감으면 저절로 그 일들이 모여들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 결국 엄마, 소연도 말라가는데. 드문드문 밖을 내다보며 헛소리를 할 때가 잦아졌다. 그러다 슬픔을 억누르는 것처럼 가슴팍을 쥐어뜻더니 곧 세상을 떠나고. "엄마, 엄마... 엄마가 왜 죽어... 흑 흑" 하며 목을 조여 오는 슬픔에 윤희는 크게 울부짖었다
그렇게 윤희는 엄마 소연의 죽음으로 큰 타격을 받고, 이끌리다시피 근처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외할머니는 딸을 잃은 슬픔이 커서 윤희를 잘 돌보지 않았고, 애간장 끓는 소리를 하루 종일 뱉어냈다. "소연아... 내 새끼 소연아... 뭐가 급해서 어미와 자식을 두고 그리 일찍 가느냐..." 하며.
그 소리는 자식을 앞서 보낸 한 여자의 비애로 그렇게 넋을 반쯤 잃고 읊어댔다.
윤희는 미란이 죽고 난 후 모든 일이 이리된 것 같아 죄책감이 온몸의 가시처럼 뒤엉켰다. 자신에게 피 냄새가 나는 듯도 해서 개울에 가 몸을 빡빡 씻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윤희의 무거운 발걸음이 어쩌다 미란의 집을 향하게 되고. 그녀는 뒤돌아 가려다 문득, 아무도 없는 미란의 집을 목을 쭈욱 빼고 기웃거린다. 그러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고. 그새 미란의 집은 폐가처럼 변해 이리저리 물건이 나뒹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미란의 가방과 노트 그리고 일기장이 보이고. 일기장에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미란이 "읽지 마!" 하며 장난스럽게 손을 탁탁, 칠 것만 같다. 그 생각을 한 그녀는 물건을 물끄러미 보다 슬며시 창문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서랍장을 밟으며 창문 건너 기찻길로 나가고. 미란과 즐거웠던 순간을 기억하며 그 길을 걷는다. 그러다 제풀에 지치면 담벼락 쪽에 쭈그려 앉아 쑥을 만지고.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벽에 기대어 스르륵 잠이 드는 윤희.
그러다 누군가 "윤희야~ 윤희야~" 하는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 소연의 영혼. 옷이 하늘거리며 한결 밝은 얼굴로 맞은편에 서있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윤희를 오라고 연거푸 손짓을 하고. 그녀는 너무 기쁜 탓에 "엄마~ 엄마!!" 부르며 환한 얼굴로 일어서 기찻길을 건넌다. 엄마를 오직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성큼성큼 발을 내딛게 하니. 그녀는 기쁘기 그지없다.
그런데 철도를 건너는 그때, 밤늦게 열차가 덜커덩하며 들어오고 있는 그때였다. 윤희는 소연의 영혼을 보며 기찻길을 건너는데, 선로 중간쯤에서 치맛자락이 뭔가에 붙잡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다 서서히 아래로 눈을 돌렸다. 그러니 그건 피투성이가 되어 기괴하게 웃는 미란의 영혼이었다. 사지를 틀며 윤희의 치마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이를 악물고 움켜쥐고 있었다. 잡고 있는 손이 어찌나 강한지 윤희의 치마가 갈기갈기 찢어질 듯하다. 윤희는 그 모습에 엄마를 부르며 발버둥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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