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어릴 적 신동이라 불리고 일류 대학을 나온 28살 강정우. 그런데 취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시간을 몇 년 허비하다 13명 정도 근무하는 '다도림' 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이에 만족해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일을 배웠고, 부모님도 좋아했다. 그러나 기뻐하는 것도 잠시, 업무 보는 일은 만만치 않았고, 신입이라 적응하기도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보다 일 처리가 남들보다 늦는 정우. 그건 신중한 성격 탓도 있었고, 섬세한 성격 탓도 있었다. 그걸 알리 없는 회사 동료들은 그가 일머리 없게 보이기도 했으니. 험담의 주요 인물이 되기도 했다.
"일류 대학을 나오면 뭐해요? 저렇게 둔한데" 박하나는 히죽거리며 강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꼭 미련한 곰 같아요, 곰"
고아인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놔둬, 저런 인간들도 살아가야지, 암튼 민폐야 민폐."
최우철도 거들었고, 그 주변에 동료들도 그것이 일상이라는 듯 반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 한 사람 오미림만 그를 여러모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강정우는 고마워하며 "매번 고맙습니다!" 하니 그녀는 "사람들 말, 신경 쓰지 말아요." 하며 그를 토닥인다.
그러니 그도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그런 타인의 말에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우의 그런 태도에 그를 막말로 뜯는 것이 재미가 붙었는지도 모를 회사 사람들.
그래서 그는 매일 "아, 죄송합니다..." 하며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고, 그날도 다를 바 없는 그에겐 그저 그런 하루였다.
어느 날, 점심시간. 정우는 도시락을 들고 옥상에 올라갔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기도 하거니와 혼자 점심을 먹는 것이 속 편했다. 올라가니 식사를 마친 직원들은 휴식공간에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 주위에 가벼운 인사를 하고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정성껏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먹으려 애썼지만 점심시간이 마칠 때가 되었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런데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이재 과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정우 씨 밥도 느려 밥도~"
그 말을 하자 곁에서 듣고 있던 김하철 대리는 깔깔대며 웃는다. 그리고 한 과장 외에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김 대리는 "회사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 강정우 씨~ 그냥 나무늘보로 불러줘?"
그렇게 김 대리는 한 과장의 행동에 한 술 거들듯 그를 향해 계속 빈정됐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정우. 마치 속을 도려내는 말에 익숙한듯하다.
그러니 더 속이 꼬이는 한 과장과 김 대리. 그들은 어떡하든 그의 기를 누르고 싶다. 그 생각에 시비를 털 것을 찾는지 그를 아래, 위를 훑어보는데.
그때 유독 빛나는 그의 팔찌를 보게 된다. 그건 옥색 구슬 팔찌였다. 호기심이 생긴 김 대리와 한 과장은 눈이 마주치더니 의문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강정우에게 바짝 다가가 손을 낚아채 팔찌를 뺏는다.
그러자 강정우는 깜짝 놀라며 수저와 도시락을 떨어뜨리고.
"왜 그러세요, 김 대리님. 팔찌 주세요, 제겐 소중한 겁니다!" 했다.
하지만 팔찌는 김 대리에서 한 과장으로 넘어가고. 한 과장은 팔찌를 만지작거린다.
"이딴 팔찌가 뭐가 중요해, 싸구려구먼 쯧쯧"
그는 비웃듯 강정우에게 말을 던진다.
그러니 "그건 제 할머니가 주신 유품이에요...!" 하고 호소하듯 말하는 정우, 한 과장의 손에 있는 팔찌를 잡아채려 한다. 하지만 한 과장은 다시 팔찌를 김 대리에게 주고, 김 대리는 "가져가봐~ 나무늘보 씨~" 하며 팔찌를 흔들다 순간, 놓치게 되는데.
팔찌는 옥상 담벼락 바로 밑, 돌 틈에 떨어졌다. 아슬아슬하게 벽에 걸쳐져 있는 옥색 팔찌. 정우는 땀을 삐질 흘리며 팔찌를 주우려 팔을 뻗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그런 그의 옆에는 목을 뒤로 젖힌 채 웃음보가 터진 한 과장과 김 대리가 있다. 그들은 몸을 뒤틀며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과장과 김 대리가 발로 정우의 엉덩이를 슬쩍슬쩍 건드리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겁을 주려던 의도로 살짝 치고 나면 둘은 또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런데 정우는 팔찌를 주우려는 힘과 그들의 장난에 몸 중심을 잃게 되고,
그 힘에 옥상 밑으로 빨려 들어가듯 떨어지는데. 떨어지면서 '으악' 하고 어디든 붙잡으려 손을 뻗는 정우. 한 과장과 김 대리도 당황한 나머지 "어어!!" 하며 옥상 땅바닥을 헤집듯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아악, 사람이 떨어졌어요!!" 하는 건물 밑, 누군가의 음성.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웅성대며 바삐 응급차를 불렀다.
파르르 떨리는 강정우의 입술, 피는 바닥을 물들이고 머리는 으스러져 있다. 그리고 그의 눈망울은 공중을 향해 초점을 잃어갔다.
"어... 어떡해요?" 김 대리는 한 과장에게 물었다.
"어, 어떡하긴 우린 아무 상관없는 거야, 아무도 모르니 절대 발설하지 마! 알았지, 김 대리!" 그렇게 한 과장은 단호하게 말하며 김 대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알... 알았습니다..." 그리곤 한이재 과장과 김하철 대리는 서둘러 급히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응급차를 타고 간 강정우는 사망 진단을 받게 되는데.
그 일로 당분간 회사는 쥐 죽은 것 같이 조용했고, 회사는 강정우의 장례에 최소한 경의는 표했지만, 속으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들보다 홀가분하게 여기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13명에서 12명으로 바뀐 거 외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이 되어갔다.
그리고 몇 달 후
회사에서 야유회를 가는 날짜가 다가왔다. 매년 하는 행사라 직원들이 스타렉스를 빌려 야유회를 가는 일과로, 13 인승을 빌렸더랬다.
꽉 채웠을 자리는 강정우의 죽음으로 그날 자리 하나를 비운 채 12명이 탑승했다. 한이재 과장의 자리는 운전석 바로 옆이었는데. 그는 잠깐 눈을 붙일 겸 의자를 뒤로 젖히려 했다. 하지만 의자가 삐걱댈 뿐 젖혀지지 않는다. 뒤를 보니 그 자리는 비어있었고 사람이 없다. 한 과장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고장 나 그러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직원들과 신나게 떠들며 갔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고, 백숙이 놓인 밥상에 밥부터 먹고 들뜬 직원들. 족구를 하며 서로 친분을 다진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낸 여행 첫날, 어두워진 밤, 각자 술상이 차려진 밥상머리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을 기울이는데. 박하나가 갑자기 진실게임을 하자고 권했다. 그것은 불을 다 끄고 촛불만 하나씩 들고 하는 진실게임이었고. 사람들은 재밌겠다고 하며 박하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모두 밥상을 대충 치우고 박하나가 준비한 촛불을 켠다. 그리고 고아인이 일어나 전기를 다 끄고 나지막이 분위기를 잡는데 하나둘씩 자신만의 비밀을 얘기하게 유도하는 박하나.
"제가 먼저 입을 엽니다" 하고 그녀가 운을 뗐다.
"저... 말이죠... 실은 저, 최우석 씨랑 사귀어요!"
"뭐? 진짜야? 둘이 그렇게 안 봤는데, 언제부터 사귀었어요?" 하며 동료들은 깔깔대고. 최우석은 멋쩍은 듯 고개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우석의 비밀. "저도 비밀을 하나 말하자면... 사실 박하나 씨랑 사귀기 전, 퇴사한 김미리 씨와도 사귀었어요..." 하고 말하는 최우석. 박하나는 "사실이야? 우석 씨. 아, 진짜, 짜증 나" 하며 그를 노려보고. 사람들은 그 모습이 재밌어 또 웃는다. 그렇게 하나, 둘씩 비밀을 말하고. 동거 중이라 말하는 사람, 그리고 이혼했다고 말하는 사람. 여러 명이 사실을 토해낸다.
그러다 이번엔 고아인이
"저는 사실... 사실 말이죠. 야간에 사업을 하나 하고 있어요." 하고 말하고,
오미림은 "무슨 사업이에요?" 하고 묻는다.
"그건 마사지 사업이에요." 하며 고아인은 눈을 치켜뜨고 입을 가린 채 말했다. 그러자 "마사지? 의왼데. 불법은 아니지?" 하는 한 과장. 그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아이, 참 과장님은 생각이 고리타분하시네요, 요즘 마사지 그런 거 아니에요." 하고 답하는 고아인.
"아니, 그게 아니라, 알았어, 알았어, 대단해~ 일을 두 가지씩 하다니... 근데 내 비밀이 가장 셀걸? 하하"
한 과장은 선전포고를 하듯 특유의 이마의 굵은 선을 그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오미림이 "저도... 비밀이 하나 있어요..." 하고 털어놓는 말
"저... 고인이 된 강정우 씨... 강정우 씨 말인데요, 너무 안타깝고... 그리워요..." 하니 사람들이 움찔하며 서서히 게임이 무르익는데.
의외로 '강정우'라는 말에 사람들이 입을 못 떼고 오미림 눈치만 살핀다.
그러자 다음으로 한 과장이 말을 이을 참인데. 오미림의 말이 모두의 주목을 받자. 자신도 어떤 비밀을 밝혀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킬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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