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비가 세차게 오는 어느 날 오후, 일본의 작은 원룸 5층에서 9살로 추정되는 아이가 쿵 하고 떨어졌다. 줄무늬 티셔츠에 파란 청바지를 입은 남자아이. 그 아이는 가엾은 신음을 내뿜고 있었다. 피는 빗물과 섞여 점점 원을 그리며 흩어지고. 겨우 식별할 수 있는 앳된 얼굴은 뭉그러져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2000년,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일본 유학. 그 길을 가는 것이 꿈만 같은 21살 장희주. 그녀는 공항에 들어선 입구부터 여러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유학 결심을 하고 일본 내 학교 입학시험, 면접까지 준비했던 지난 시간들. 포기하고 싶었던 고충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 배웅 나온 엄마의 모습에 괜스레 울컥하기도 하며. 이제 홀로 일본에 도착하면 더한 힘든 과정도 스스로 헤쳐나가야 될 것이다. 그녀는 그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져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섰다.
일본에 가는 비행기에서의 두어 시간, 목적지에 도착했고, 집은 일본 유학을 알선해 주는 이로부터 학교 가까운 곳에 집을 얻었더랬다. 막상 가보니 주변에는 주민들이 많고, 초등학교도 있었기에 생각보다 안정감이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가구를 드릴 요량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름 깨끗하게 집을 치우고. 침실은 복층 구조였는데 그 밑으로는 책상이 있어 책을 정리해 놓아두기 좋았다. 집이 좀 작기는 했으나 이 정도면 유학 생활을 하는 데는 썩 나쁘지 않다.
그녀는 저녁쯤 되자 간단한 먹을 것을 사서 챙겨 먹고 샤워를 한다. 그러자 일본에 온 첫날, 긴장감이 녹고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가 얼굴을 침대에 묻었다. 그리곤 몸이 노곤해지더니 잠이 몰려와 눈을 감는다.
다음날, 그곳에서 꽤나 유명한 시로노 학교. 가고 싶었던 학교에 합격해 발을 내디디니 뭔가 감개무량하다. 그리고 자신이 전공한 의상학과. 그 학과에 가니 여러 각국의 친구들을 만난 인사를 하는 정겨운 하루, 희주는 생경한 경험에 한껏 설렜다.
그러나 걱정이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일, 생활비에 보탬이 되려면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비좁은 시간을 쪼개어 학교에서도 집 근처에서도 이리저리 알바를 살펴보는 희주. 그때 가까운 거리에 9살가량의 남자아이 돌봄이라는 전단지가 보였다. 그녀는 전단지에 있는 전화를 하고 면접 차 그 집으로 갔다. 가니 홈 스쿨을 한다고 하는 9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애와 그의 엄마라기에는 젊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유학생이란 말에 흔쾌히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잘 왔어요, 함께 놀아주기만 하면 돼요. 두 시간 정도. 그리고 간식 정도 챙겨주시고" 희주는 그 말에 딱 맞는 알바를 구한 듯했다. 9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이름은 키로였는데 그 생김새가 동글동글하고 눈이 커서 귀여운 편이었다. 키로는 꽤나 밝은 모습으로 희주를 대했다. 그러니 그녀도 특유의 친화력으로 키로에게 다가간다.
주로 낱말 맞추기를 하던가 키로가 그림을 그리면 함께 색칠을 하기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키로는 나이에 비해 꽤 재능이 많았고, 언어 구사도 유창했다. 이를테면 구름 속 구름을 오색실로 꿰매어 구름다리를 만들고 싶다거나 바람이 가는 대로 자신이 흘러가고 싶다거나 하는 말들이었는데. 그럴 때 희주는 한 번씩 어른스러운 창작을 칭찬하며 키로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면 그도 희주가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을 그윽하게 펴 연신 웃고 있었다.
그렇게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를 오고 가던 희주. 그녀는 생활에 적응하자마자 뜻하지 않게 같은 과의 일본 남학생으로부터 고백을 받는다. 근처에 살고 이름은 다큐야로 꽤 다부진 체구에 훈남형이었다. 희주는 유학 중에 사귀는 것이 고민되지만 일단 서로를 알아가기로 했는데. 그들은 서로의 공통된 과제를 봐주기도 하며 알콩달콩한 연애를 시작하였다. 가끔 키로를 봐주다가 희주가 늦어지면 다큐야가 간혹 바래다주러 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키로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기도 했다.
그러다 석 달이 지난 하루, 키로는 느닷없이 눈을 치켜뜨고 희주에게 다큐야에 대해 물었다. "남자친구 좋아해?" 키로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답을 갈구하는 것 같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키로도 좋아하고 남자친구도 좋아한다고 대답을 했다. 키로는 대답이 부족했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불만 가득한 어두운 표정. 그러더니 갑자기 함께 있기 싫다며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리고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희주는 "키로, 키로~ 네가 더 좋아~" 하며 달래주어야 키로는 방 밖으로 간신히 나왔다. 그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났으며 키로가 번번이 남자 친구, 다큐야를 두고 비교하는 것이 그녀는 탐탁지 않았고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희주가 학과에 가니 다큐야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래서 희주도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갔는데 그가 얼굴을 다쳤는지 상처가 있었다. 크지 않은 상처였지만 너무 놀란 그녀는 다큐야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다큐야는 어젯밤에 복면을 한 강도가 집에 들었다고 했는데 자신이 깨서 상대와 옥신각신했다고 했다. 그래서 강도는 도망갔지만 얼굴의 상처가 생겼다고 했다. 다큐야는 수업을 마치면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할 거라고 했는데. 희주는 몹시 걱정을 하며 다쿠야를 위로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 다큐야가 한 가지 특이점을 얘기했다. 강도가 어른이라 하기엔 생각보다 체구가 작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몹시 날렵했다는 얘길 하면서. 또 범인의 목 주변에 자신도 손톱으로 긁었다는 얘기. 그래서 강도에게 방어흔이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 말에 희주는 같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에 섬뜩하고 두려운 마음이 되었다.
그녀는 그날 남자친구에게 그런 일이 있고 하니 마음이 혼잡했다. 하지만 할 일은 해야 했기에 키로의 집으로 갔다. 키로는 대문의 벨을 누르자 바로 열어주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기에 희주는 놀아주려 키로가 좋아하는 물건, 낱말 끼워 맞추기 게임기를 가져다주었다. 하나 그는 게임기를 보고도 평소와 다르게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고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키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가 키로를 보는데 그의 목에 손톱자국이 있는 것이 아닌가.
"키로, 어쩌다 다친 거니?" 하고 희주가 물었다. 하지만 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상처는 작정하고 할퀸 것만 같이 깊어 보였다. 그녀는 혹시나 집에서 키로가 학대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키로는 오늘따라 피곤한지 잠깐 자고 싶다고 했다. 희주는 그렇게 하라고 한 뒤 잠을 자러 간 키로를 뒤로하고 응급처치 약이 있는지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데 거실장 한쪽 구석진 곳에 앨범이 보인다. 희주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앨범을 집어 들었다. 앨범은 꽤 오래되고 낡은 것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앨범을 열었다. 앨범에는 키로와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볼수록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사진 밑에 날짜가 1984년 9살이라 적혀있는 키로의 사진. 그런데 현재 2000년 그가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성장하지 않고 똑같은 모습들의 키로. 희주는 앨범을 보다 소름이 끼쳐 앨범을 떨어뜨렸다. 그러다 다시 주워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다시 앨범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연도가 거듭되어도 키로의 모습은 변함없이 여전하다. 그 옆으로의 사람들은 변해가고 있고, 키로의 지금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도 엄마가 아닌 것이 분명한 것만 같다. 희주는 손이 떨리고 그가 혹시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오싹함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얼른 앨범을 있는 자리에 넣었다. 그때 키로가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뭐 해?" 키로는 정색을 하며 희주에게 물었다. "아니 저기 뭐 상처에 바르는 연고라도 찾으려고 너 목에 상처가 있길래"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그는 의심이 가는 눈초리로 희주를 바라보다 간식을 먹겠다고 했다. 희주는 간식을 챙겨주면서도 손이 떨렸다. 그리고 "저기... 키로... 내가 오늘 몸이 좀 아파서, 오늘은 좀 일찍 갈까 하는데 괜찮아?"
키로는 떨떠럼한 얼굴로 "많이 아파? 음... 알았어, 그래 그럼.' 키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희주는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또 올게" 하며 애써 웃으며 집을 나서려 했다. 그때 키로가 달려와 "잠깐" 하며 팔을 잡는다. 그리고 "반듯이 와야 해!" 하며 다그친다. 그의 강압적인 모습에 위축되는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질러 집을 나갔다. 뭔가 그동안 아이 같지 않은 말들이 생각나면서 청년을 돌보고 있었다는 것인데 감정이 세하다. 거기다 목에 난 상처, 다쿠야의 집에 작은 체구의 강도가 침입해서 상처가 났다고 했는데. 혹시, 키로가 질투심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은. 그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이른다.
그녀는 집에 와서도 아무래도 꺼림칙해서 키로를 돌보는 알바를 그만둘 생각이 들고. 그래서 키로의 보호자인 여자에게 전화를 해서 의사를 전달했다. " 하는 수 없죠... 키로가 많이 좋아했는데... 섭섭해하겠어요." 하는 말을 한 뒤 여자는 알았다고 했다.
희주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라도 끝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비가 때리듯이 오는 밤늦은 시간, 그녀가 자고 있는데 문 초인종 소리가 났다. 희주가 나가서 문구멍으로 보니 비에 흠뻑 젖은 키로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희주는 놀래서 "이 밤에 어쩐 일이냐?"라며 물었다. 키로는 무작정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할 말이 있다며 쿵쾅거린다. 희주는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주변을 소란스럽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남자친구 다큐야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또 전화를 건다. 계속해서 다큐야가 전화를 받지 않자 희주는 음성 메시지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당황한 희주는 키로의 성화에 못 견뎌 문을 열었다. 키로는 본 적 없는 무서운 얼굴로 성큼 들어오더니 왜 집에 오지 않느냐고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며. 희주는 학교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키로는 믿지 않는 눈치다.
"집은 어떻게 안 거야?" 희주는 혹시 평소에 미행이라도 한 것일까. 생각하며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 따라왔었어" 하고 말하는 키로.
그녀는 왠지 모를 공포감에 찬물이 끼얹는 듯 몸이 차가워졌다. 그때 다큐야에게 끊임없이 전화가 울리고. 전화를 받으려 하니 키로가 전화를 발로 찬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던 키로는 얼굴이 하얘지더니 호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냈다. 희주는 "그러지... 그러지 마 키로..." 하며 그의 행동을 자제시켰다. 하지만 키로는 냉정하게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다시 집에 와 희주, 나랑 같이 있어줘, 널 정말 사랑해..." 하고 말하는 키로. 희주는 무서움에 벌벌 떨며 사랑고백에 아무런 답을 못했다. 그러자 키로는 "사랑해! 사랑한다고!" 하며 막무가내 고함을 치고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물러서다 팔을 다친 희주. 피가 떨어져 옷소매 쪽으로 흐른다. 희주는 "너 아이 아니잖아, 너의 비밀을 알아!" 했다.
그녀의 말에 키로는 갑자기 웃기 시작하더니 "나는 늘 아이야, 아이. 보호받아야 되는 어린아이라고!" 키로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성인의 말투. 누가 본다면 한 치도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그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영민해서 사전에 이 상황을 연습했을 수도 있다. 희주는 그 생각이 들자 땀줄기가 등을 타고 내렸다. 그러니 이 상황에선 그녀는 자신을 가다듬고 차분해야만 했다. "나도 네게 호감이 있어, 정말이야, 네가 매일 가서 너랑 함께 할게." 그녀의 다정한 말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키로. 그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대더니 뺨을 타고 떨어졌다. 영원히 갇혀버린 어린아이의 껍질. 그는 평범한 삶을 갈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전화에 남겨 있던 메시지를 듣던 남자친구 다큐야가 수상함을 인지하면 경찰과 함께 희주의 집에 들어섰다. 키로는 당황해하며 창문으로 바짝 다가섰다. 경찰은 "칼을 내려놔!! 칼을 내려놔!!" 하며 키로를 향해 공포탄을 발사해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키로는 그 소리에 칼을 내려놓는가도 싶더니 잠깐 움찔했다. 그러다 꽤 높은 희주의 집 5층 창문을 열어젖히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희주는 "안돼!!"라는 소리를 질렀지만 그 일은 순식간이었고, 그는 세상으로의 결별을 선택한 뒤였다.
그 후, 밝혀진 키로의 정체. 키로는 25살이었고, 다쿠야를 해코지한 것도 키로였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있던 사람은 그의 여동생 23살 아사코. 어쩐 일인지 부모는 5년간 실종 상태였고 꽤 큰집에 남매만 살고 있었다. 오빠, 키로는 성장호르몬 결핍증으로 성장이 멈추어 집에만 있었고, 그가 우울해하는 것을 보다 못해 아동 돌봄을 이용해 그녀가 알바인을 구한 것이다. 사실을 모두 안 희주는 마치 머리에 큰 충격을 얻어맞은 것처럼 한동안 넋이 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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