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조건 없이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를 배신하는 이들은 쉽게도 상대를 농락하며 우발적으로 믿음의 고리를 파괴했다.
1998년 가을, 나이 40세 황정만. 정만은 부동산 사업을 하며 제법 돈을 모았지만, 밖으로만 돌던 그는 말로만 듣던 이혼을 했다. 아내가 더 이상 매정한 사람과 못 살겠다고 이혼장을 내놓은 것인데, 아무리 배신감이 드는 급작스러운 말이라고는 해도 그는 그녀를 탓할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여태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자신을 받아달라, 아내에게 말하기도 뻔뻔했기에. 그는 몇 달 후, 법원에 갔고 꽤 많은 위자료를 지불하며 헤어지는 선택을 했다. 그 탓에 밥을 제때 먹지 못하면서 그는 마르고, 이발도 하지 않던 터라 머리는 얼기설기 지푸라기를 쑤셔 넣은 빗자루와 같았다.
그러던 중 정만에게 건강까지 악신호가 왔다.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췌장암이라는 병까지 진단받았으니. 그의 삶도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말을 수시로 할 만큼 그건 과언도 아니었다. 때론 어차피 아이도 없는 처지에 혼자 짊어질 부채쯤 하나 있어도 된다, 그리 생각하기도 하며. 하나 정만은 생각보다 삶의 의지가 있었고, 그 끈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스무 번도 넘는 항암치료와 세 차례의 수술, 3년여간 치료를 줄기차게 받는다. 그러면서 면역을 위한 자연치료를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약초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였을까. 생각으로만 여겼던 귀농을 정만은 결심하게 되었다. 어릴 적 시골에 산 탓에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뛰면서 자랐던 그 시절, 몸이 약해지니 몹시 그리웠던 탓도 있었다.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도시에서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 그 생활도 그를 고단하게 했었고, 쉴 새 없는 상하관계로 피로함을 가중시켰으니. 그래서 정만은 거듭 고심 끝에 마음에 드는 시골에 안착하고자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1년여 동안 이십여 차례 돌아다녀도 딱히 마음에 드는 마을을 찾기란 녹녹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만은 계속 알아보던 중 깊숙한 산자락을 거닐다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명칭은 "노원천"이라는 마을이었는데.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이름이 장승 옆, 바위에 떡하니 새겨있었기에 금방 알 수 있었다.
왠지 마을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고 외부인이 그다지 많이 들어오지 않은 듯하다. 뒤로는 울창한 숲이 마을을 에워싸듯 우거지고, 주변엔 계곡은 물이 맑다 못해 보석처럼 빛나는 곳이었다. 거기다 그가 원하는 약초와 버섯이 무성했기에 정만은 설레기까지 했고. 그러다 깊이 들어가니 띄엄띄엄 집이 보인다. 그곳은 조금은 사회와 동떨어진 듯한 낡은 시골집. 그는 워낙 깊은 산속이라 그러려니 했다.
정만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우선 주변을 한참 둘러보게 되고. 그런데 몇몇 지나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뭔가 옛날 옷 같아 신기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의문의 눈초리로 정만을 신기한 듯 뚫어져라 보는 것이다. 뭔가 그 느낌은 사람들이 못 볼 것을 본 모양으로 경계하는 모양. 낯선 이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시선들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마을의 위치가 산등성이라 그런지 날씨가 여름인데도 왠지 모를 한기가 주변에 남아 정만을 알게 모르게 닭살 돋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묘한 느낌의 마을이긴 하나 모처럼 마음에 든 곳이었기에 정만은 마을 사람에게 부러 말을 걸기도 하고 가까이 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그가 오히려 부담이 되는지 다들 피하기만 하고, 선뜻 나서서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집 밖으로 나오는 아낙은 그가 보이자,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 버릴 정도였다.
정만은 그런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당황했으나, 보면 볼수록 노원천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절경이 마음에 들고, 거기다 청량한 산새의 소리는 그를 어린 시절로 이끌었기에. 정만은 이곳에서 여생을 꾸릴 만큼 정착하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그리 마음먹은 이상, 이곳에서 더 머물며 더 알아보려 애써야만 할 것이니. 그래야 마을 사람들이 마음 한편을 나눠주지 않을까, 정만은 생각했다. 그래서 거주할 터를 마련하기 전, 사람이 없는 어수룩한 빈집을 찾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시간을 갖고 마을에 머물렀다.
그러던 오후, 정만이 두루두루 산 쪽을 알아보던 길, 초행길이다 보니 그도 모르게 길을 잃게 되었다. 아무리 빠져나가도 그곳이 그곳인듯한 숲이 그를 따르고. 정만은 끊임없이 헤매길 세 시간, 지칠 대로 지쳐 넋 놓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때쯤, 숲 속에서 그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61세, 한범으로 큰 키에 인상이 날카롭고 눈매가 매서운, 묶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짜고짜 강한 손짓을 하며 정만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더니 자신이 지은 걸로 추측되는 버드나무가 있는 돌담집으로 정만을 인도하고, 그곳은 마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렇게 혼자 외진 곳에 사세요?" 하고 정만이 물으니 한범은 대답이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묵묵히 정만을 방으로 이끄는 것이다. 정만이 방에 들어가자 불당 같은 제단이 있었는데 앞쪽으로는 장군으로 보이는 큰 그림이 있고, 제사상처럼 과일이면 떡, 전이 올려져 있었다. 정만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으나 크게 그것에 대해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냥 모르는 척하며 않아있었다, 그러다 한범이 정만에게 어떠한 말도 묻지 않았지만 정만은 "저는 이 마을에 살려고 들어왔어요. 약초를 재배하기도 좋고, 산수가 멋져서...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아서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정만이 얘기했음에도 한범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제단에 향을 꽃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더니 "그간 마음고생을 꽤나 했겠수다"라고 불현듯 정만에게 말을 던졌다. 마치 그를 꿰뚫는 듯한 한범의 한마디에 왠지 정만은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다 어느새 정만은 주저리주저리 인생을 읊기 시작하고. 그러자 입이 무겁던 한범이 다 듣더니 "그려, 마지막 인생 여정은 홀가분하게 가는 것이여" 하며 정만에게 여기서 일단 하루를 자라는 식으로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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