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산티아고 순례길 마지막 이야기
'행복은 만족을 느끼는 길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책을 묵묵히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다. 항상 나를 개조시키고 채찍질하는 말로 가득할 것만 같아서 멀리했던 자기 계발서에서 내 생각과 같은 구절을 읽으니 괜히 반가웠다. 그리고 완벽히 공감하는 말이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목표로 가는 길에서 생겨나고 그걸 발견하면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렌디피티(Serendifity)라고 하는 우연에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며칠간 머릿속을 떠다니는 무언가를 마침내 가지게 되었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결국 만났을 때도 행복해한다. 더울 때 시원한 바람이 스칠 때마저 우리는 행복하다. 이렇게 우리는 크고 작은 행복을 느낀다.
산티아고 도착 100km 전 지점인 사리아에서부터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는 참 시간이 안 가는 듯하면서도 빨리 흘러가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으면서도 도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계속해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점점 가까워져 오고 체력은 어느 때보다 가장 높은 수준이었지만 내 몸은 첫째 날 무서운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 여정이 800km가 아니라 100m 달리기였다면 달랐을까. 그랬다면 누구보다 목표에 더 빨리 도착하고 싶어 했을 텐데 말이다. 산티아고를 도착하는 날에는 함께 걷는 순례자들과 비석에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탄식을 하면서 걸었다.
하지만 이 복잡한 감정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알 고 있었다. 이 여정에서 행복이란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의 성취감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경험들,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이제 산티아고는 더 이상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산티아고는 그저 우리 인생에서 짧은 경험을 마무리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저 이 멋지고 대단한 경험의 마지막 장을 장식해야하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여정에는 끝이 있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기에, 나는 이 여정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했다.
알베르게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한 순례자가 "Camino chose me"라고 간단히 대답하자 모두가 엄지를 치켜들며 박수를 쳤다. 공감의 반응인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각자 다양한 사연들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이곳을 오게 된 데는 크나 큰 이유가 없다. '그냥'이라는 대답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나도 이곳에 여러 의미를 찾으러 왔다고는 했지만 '그냥' 문득 앉아있다가 이곳에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곳에 오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없다. 이 길이 나를 불렀기 때문에 그냥 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이후로는 왜 이곳에 오게 되었냐는 질문에는 항상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camino chose me'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대답하면서 마음가짐도 조금씩 바뀌어 갔던 듯하다. 초반에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을 때는 이 곳에 오게된 이유를 잊어버려 그 질문의 답을 찾으려 머리를 써야했다. 혹여나 답을 찾아도 그 답은 또다시 질문이 되어 내가 이곳에 온 이유의 답을 이 길에서 무조건 찾아야 한다는 압박으로, 두통이 알게 모르게 쌓여왔다. 하지만 이 길이 단지 나를 선택했다고 여기니 내가 이곳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냥 이곳에 있는 거고 나는 이 길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러던 중 길에서 'we are human beings not human doings'이라는 문구를 마주쳤다. 그렇다. 우리는 존재만으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선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목적을 찾으려 노력하지 말고 세상이라는 큰 여정에서 우리는 즐기면 된다.
순례를 끝마치고 나서 산티아고를 다녀왔다고 말하면 산티아고로 너무 떠나고 싶지만 시간을 낼 수 없다면서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산티아고를 알고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에 잠시 놀란다. 그러나서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산티아고가 부를 때가 있을 거라고, 그날을 기다리면 된다고. 이 길이 나를 선택하는 때가 오게 되어 있다. 해리포터가 호그와트 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처럼 우리에게도 그때가 올 것이다. 무리해서 그곳을 가겠다고 다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가 되면 스스로 상황을 만들어 낼 것이니까. 그 타이밍이 온다면 기꺼이 그 여정을 받아들이고 마법 같은 순례길의 순간으로 들어가 모든 감각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기회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다가왔을 때 잡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스쳤다가 흘러가기 마련이다. 이 것이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확실히 잡아서 멋진 여정을 떠나고, 그러고 나서 생각했으면 한다. 나는 이 여정에 선택받았으니 열심히 즐기자고. 이곳은 누누이 말해온 것처럼 상식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운 순간을 마주치고 불가항력적인 매력이 있음은 확실하므로.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 한 순례자가 'Buen Camino Simepre' (*Siempre = always = 항상) 라며 앞으로의 길을 응원해주었다. 이 길에서 하루에 수십번은 하는 인삿말, 서로 건네던 인사인 'Buen Camino', 좋은 길 되라는 뜻의 이 곳에서의 인사다. 우리의 길은 계속된다. 그렇기에 이제는 Buen Camino Simepre. 세상이라는 이 길의 선택받은 우리는 열심히 걷고 걷는 중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그렇게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하자.
그러니 모두 Buen Camino Siempre!
앞으로의 모든 길이 좋은 길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