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후 노발대발하는 아빠를 보며 환멸을 느끼다
결혼식에 친엄마를 꼭 앉혀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누군가 엄마는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 나를 키우지 않았으니 혼주석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수긍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낳아주고 내 피가 섞인 내 얼굴을 닮은 엄마. 헛헛한 사춘기를 보내며 엄마를 죽도록 원망도 증오도 해봤지만, 그냥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엄마는 내 결혼식 혼주석에 앉을 자격이 충분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비록 이혼해서 서로 미워할지라도 딸의 결혼식날 만큼은 싫은 표정은 숨기고 서로 양보하길 바랐다. 나보다 몇십 년은 더 산 분들이니 제발 그날만큼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싶었다. 딸을 헤아려주면 안 되는 걸까. 딸을 보듬어주면 안 되는 걸까. 아빠는 기어코 나를 키워주지도 왕래하지도 않은 호적상 새엄마를 자기 옆에 앉혔고 그렇게 결혼식이 끝났다. 아무 힘이 없던 내 결혼식. 내가 고작 할 수 있었던 건 엄마와 조용히 사진 한 장 남기는 일이었다. 그걸로 만족하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예식이 끝나고 모두가 빠져나갔을 때 엄마를 조용히 불러 사진을 찍었을 뿐이다. 우리가 사진 찍는 모습이 피로연장에서 실시간으로 상영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걸 알게 된 건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였다.
나와 남편은 보름간의 달콤한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을 하며 결혼식장에서의 속상함도 풀고 부부로서의 미래를 그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근데 이상하게 아빠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연락을 해도 "한국에서 보자"며 단답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음날 친정으로 향했다. 차로 5시간 거리였지만 그래도 결혼하고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마음으로 남편과 나는 설렜던 거 같다.
내가 혼자였다면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집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닌 남편과 함께 하는 상황에서 할머니집으로 가는 것도 이상했다. 불편하고 어색하더라도 공식적인 내 친정부모집에 가는 게 맞았기에 아빠집으로 갔다. 시부모님이 챙겨주신 선물도 두둑이 챙겼다. 아빠집 앞에 도착한 후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우리 왔어. 위로 지금 올라가려고."
아빠는 올라오라는 소리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는 집이 아닌 허름한 고깃집에 나와 남편을 데리고 갔다. 아빠 앞에 우리 부부는 나란히 앉았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아무 말 없이 소주를 시켜 홀로 잔을 비우는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빠는 나와 내 남편을 앞에 두고 엄마에 대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의 입으로 나온 이야기는 아주 뻔하고도 질리는 이야기였다.
엄마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애 셋을 두고 이혼을 했고 아빠가 다시 합치자고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결국 어떤 남자랑 살고 있고 사업 때문에 그렇게 힘들 때도 대학교 학비 한번 내준 적이 없었고 자식 생각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여자다. 그런 상황에서도 뻔뻔하게 니 결혼식장에 그것도 같이 사는 사람까지 데려왔다고? 너랑 사위랑 셋이 사진을 남길 생각을 어떻게 하냐.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갈 것이지, 사진까지 찍어서 그걸 너희 새엄마가 다 보게 만드냐. 새엄마의 친척들까지 모두 다 봐서 너네가 신혼여행에 가 있는 시간 동안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 뻔뻔한 너희 엄마가 뭐가 좋다고 그 좋은 날 엄마를 부르고 사진까지 찍어서 이 상황을 만드냐. 새엄마는 아무리 좋든 싫든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 기분을 그렇게 상하게 하냐. 내가 아무리 너희 엄마를 용서하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야.
아빠 입장에선 엄마가 나쁜 사람이었겠지만 엄마 입장에서도 아빠가 나쁜 사람일 것이다. 두 사람의 이혼 사유는 그게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둘 사이에 벌어진 크고 작은 모든 사건 사고들을 내 결혼식을 이유로 다시금 꺼낼 어떤 이유도 없다. 내가 보기엔 서로에게 모두 잘잘못이 있고 어느 잘못이 더 크지도 작지도 않다. 아빠는 원가족을 파탄 낸 가해자이면서도 이젠 다 잊은 것이다. 딸이 괴롭고 슬프고 힘든 것보다도 아빠는 자기 힘든 말만 쏟아내기 바빴다. 그나마 아빠가 경제적으로 자식들을 챙겼고 돌봤으니 엄마가 얄미울 순 있겠지만, 그게 결혼 후 처음 만난 딸과 사위에게 할 말인가.
‘우리 자식들이 그동안 힘들었던 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자기 힘든 것만 생각하는 거야?’
나는 아빠가 남편의 앞에서 온갖 저렴한 말을 꺼낼 때마다 "아빠 제발 그만해"라며 울부짖었다. 곱게 양복을 차려입고 고운 신을 신고 처음으로 우리 집 어른에게 인사하려고 온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이렇게 푸대접할 수 있다니.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말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아빠는 아빠집에 가서 새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가라고 했다. 나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그런 내 손을 잡아끌고 아빠집으로 향했다.
새엄마는 말도 안 되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 절대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형편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나를 키운 적도, 따뜻한 말을 건 적도 전화 한 통도 나누지 않은 아빠의 꼭두각시 같은 사람이면서, 이제 와서 엄마 감투를 쓰고 싶은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나는 그게 한평생 후회된다.
웃음기 없는 싸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그 여자. 새엄마라는 사람은 커피 몇 잔을 꺼내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신혼여행은 잘 다녀왔냐, 시부모님은 안녕하시냐, 결혼식 하느냐 힘들었지, 이런 말은 없었다. 우리 첫 사위가 왔으니 편하게 쉬다 가게, 맛있게 먹고 가게, 이런 말도 없었다. '너네가 잘못한 게 맞잖아' 하는, 차디찬 눈빛이 한동안 우리를 향하자 남편은 입을 열었다.
장모님, 많이 서운하셨죠? 저희가 부족한 게 있었다면 마음 푸세요.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세요."
나는 옆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을 흘렸다. 왜 우리 남편이 나를 만나 이런 상황을 마주해야 할까. 죄송한 일도 아닌데 죄송하다고 말을 할까. 그는 나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보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흐느끼고만 있었다. 남편의 손을 잡고 뛰쳐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5시간을 달려온 그 늦은 저녁, 따뜻한 장모님의 밥상도 받아먹지 못하고 남편은 고개를 숙였다. 우린 아빠집에서 나와 할머니집으로 가 잠을 잤다. 꺼이꺼이 우는 나를 밤새 달래준 것도 남편이었다. 다음날 아빠는 기분이 풀렸는지 아니, 새엄마가 기분이 풀려서 자기도 풀린 건지 뒤늦게 사위 대접을 해줬다. 엄마도 따로 우리를 만나 밥을 사줬다. 엄마는 어떻게 너희에게 그럴 수 있냐며 아빠와 새엄마 욕을 했다. 듣기 싫었다. 엄마도 똑같았다. 욕할 자격 없는 사람. 내 온전한 가족을 파탄 낸 가해자. 나와 내 남편이 이 꼴을 보게 만든 원인 제공자. 엄마도 아주 뻔뻔한 사람이었다. 차라리 엄마가 내 결혼식에 안 왔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이런 상황까진 안 왔을 텐데… 엄마도 미웠다. 내가 만약 엄마였다면 혼주석에 앉지도 못하면서 한복까지 챙겨 입고 결혼식장 뒤에 와서 울진 못했을 것이다. 딸이 그 모습을 보면 속상할 테니까. 결혼식 사진도 찍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다 원망스러웠다. 누구도 내 부모인 게 싫었다. 부모에 대한 배신감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전에는 그래도 아빠가 자식을 위해 애쓴다고 생각했다. 엄마보다는 확실히 부모 역할을 해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아닌 거 같았다. 아빠고 엄마고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지, 자식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살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됨됨이를 가진 사람들. 그게 나를 낳아준 내 부모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빠는 내가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 차마 내게 전화해서 분풀이를 할 수 없으니 오빠와 동생에게 온갖 화를 내고 난리를 쳤다고 한다. 나 때문에 오빠와 동생까지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부모의 이혼으로 자식이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 걸까?
나는 그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이제 난 나와 내 남편만 믿고 갈 거야. 엄마,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내 아이들에게는 내 부모 같은 이기적인 부모가 되지 않을 거야. 절대 엄마, 아빠 피를 물려받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