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고도 내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놓고 이혼할 수 있었을까

by 차부니

상처만 남은 결혼식이었다.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대해 남편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남편은 "장인어른, 장모님도 모두 마음이 상하셔서 그런 거야"라며 부모를 이해하자고 나를 다독였다. 그런 무던한 남편의 반응이 감사하면서도 혹시나 흠 잡힌 건 아닐까 걱정됐다. 그렇게 우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늘 결혼 상대자가 내 아빠와는 완전 반대의 사람이길 바랐다. 섬세하고 자상하고 가족밖에 모르고 사업도 안 하는 사람. 남편은 웃음이 많고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부모의 이혼 이후 무슨 일이든 독립적으로 해왔다.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하며 살았고 그런 삶 속에서 내 내면은 뾰족하게 날이 서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내가 둥글둥글한 남편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완벽하게 둥글어지진 못해도 뾰족하게 모난 것들이 조금씩 뭉툭해지는 것을 느꼈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일상이 이토록 행복한 것인지 평생 모르고 살았다. 뭐든 지지해 주는 가족이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내 부모는 언제나 날 외롭게 했지만 남편은 늘 든든한 내편이었다.




첫아기가 태어났다. 임신중독증으로 대학병원에서 힘겹게 낳은 아들. 태어난 아기를 보며 우린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남편은 출산휴가를 받아 조리원에서 함께 지내며 아기를 돌보았다. 우리는 아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새벽을 제외하고는 아예 아기를 우리 방에서 돌보았다. 작은 조리원 방에서 남편은 아기를 안아 트림을 시키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사진 찍고… 나는 지금도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잊지 못한다.


딸인 내가 아기를 낳았지만 엄마, 아빠는 병원에도, 조리원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결혼식 이후 내 마음속은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찼지만 그런 응어리를 바깥으로 표출하진 못했다. 단 한 번도 표출한 적이 없어 표출하는 법도 몰랐던 거 같다. 늘 무신경한, 자기중심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내 마음이 어떠한 지 들여다보기보단 '원래 저런 사람들이지'하며 체념하기 바빴다. 난 늘 엄마, 아빠의 인정이 고팠다. 무조건적인 사랑. 그 사랑을 계속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 손을 꼭 잡으며 우리 딸, 아기 낳느라 고생했어, 수고했어,라는 말을, 그 사랑을 받고 싶었다. 사랑받으려고 할수록 내가 더 아프다는 걸 그땐 몰랐다.


엄마는 아기가 백일이 되었을 때쯤 우리 집에 방문했다. 그것도 이모, 삼촌들과 모임을 마치고 이모집으로 다 같이 향하던 길에 예고 없이 손자를 보러 왔다. 30분쯤 앉아있었을까. 아기를 한번 안아보고 돈봉투를 건네준 뒤 엄마는 떠났다. 아빠는 새엄마와 함께 집에 들렀다. 엄마가 방문했던 시기와 비슷한 때였다. 아빠는 돈봉투를, 새엄마는 선물세트 같은 걸 건네주었다. 선물세트에 담겨 있던 건 '우족'이었다. 그냥 날 것인 우족. 명절 선물로 집에 들어온, 아무 조리도 되어 있지 않던 것이었다.


“푹 고아서 먹어라. 못하겠으면 시어머니한테 끓여달라고 해."


난 돈봉투가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건네주는 돈봉투도 나를 위한 마음이라는 걸 안다. 알지만 서러웠다. 다른 친구들은 아기를 낳고 친정엄마가 와서 미역국도 끓여주고 반찬도 해주고… 손자가 너무 예뻐서 매일 영상통화를 하며 지내던데…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내 마음과 부모의 마음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컸다.




아이는 너무 예쁘게 자랐다. 어지르고 떼쓰고 울고 해도 그냥 예뻤다. 존재만으로 예쁘고 늘 함께 하고 싶었다. 그 작은 입으로 “엄마”라고 말해줄 때, 통통한 손으로 내 손을 잡을 때 나와 남편은 부모라는 기쁨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아이가 조금만 열이 나도 내가 아프길 바랐다. 아이는 예쁜 말만 듣고 예쁜 것만 보길 바랐다. 아이를 낳으면 비로소 어른이 되고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던데, 난 부모가 되니 더욱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놓고 그렇게 싸운다고? 이렇게 작은 아이를 놓고 집을 나간다고?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집에 간 적이 있다. 남편도 함께 갔었고 그 사실을 아빠도 알고 있었다. 아빠도 잠깐 할머니집에 들러 아이를 보고 갔었다. 이후 아빠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친정에 왔는데 장모(새엄마)에게 전화 좀 드려. 그래도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인데.”


고향에 아이를 데리고 와도 아빠집에 오라고 한 적도 없으면서, 우리 아이 내복 한 번 사준 적 없는 새엄마에게 전화하라고 시키는 게 너무 이기적인 폭력으로 느껴졌다. 딸인 나는 싫어할 걸 아니까 전화하라고 말 못 하고, 착한 남편에게 전화하라고 강요하는 게 역겹게 느껴졌다.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


당시 둘째를 뱃속에 품고 있던 난 아빠를 만나 그동안의 울분을 토로했다. 아빠의 딸로 살면서 겪어야 했던 서러움, 서운함, 외로움, 괴로움. 나는 처음으로 아빠의 이혼과 재혼으로 짊어져야 했던 자식의 입장을 쏟아냈다. 화산이 터지듯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나는 평생 살면서 아빠 삶에 관여한 적도 없고 자식인 내게 뭘 해달라고 바란 적도 없어. 그러니 나에게도 내 남편에게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마. 서운해하지도 마. 아빠랑 같이 사는 사람한테 연락 따위 하라는 말도 하지 말라고!"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어른아이로 살고 싶지 않았다.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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