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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싱키맘 May 09. 2023

<트라우마 1>

2009년 여름 만 3세가 된 아이는 동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는 태어나서 만 3세가 될 때까지 엄마와는 오로지 한국어로, 아빠와 할머니와는 러시아어로만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새삼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이는 만 3세 때 핀란드어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최초로 핀란드 사회에 내동댕이쳐 진배나 다름없었겠구나.. 싶다. 


한 해가 지나가고 어린이집 생활 2년 차 가을이 깊어가면서 낮의 길이가 급속도로 짧아져 빨리 어두워지니 어린이집까지 어서 가서 아이를 픽업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오후 4시면 퇴근 준비로 마음은 늘 조급했다. 그렇게 칼퇴근을 해서가도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미 픽업된 상황이고 한두 명의 아이들과 레오만이 남아 모래놀이를 하고 있거나, 어떨 땐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는 어린이집 놀이터 한쪽 모퉁이에서 아이 혼자 그냥 서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괜스레 당시 막 새롭게 핀란드에서의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민자인 자신의 모습이 투영돼 마음이 시렸었다. 


도대체 핀란드 엄마 아빠들은 몇 시에 퇴근해서 아이들을 픽업해가는 건지 의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건 핀란드 직장에서는 아이를 픽업해야 하는 상황이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미리 말하고 퇴근을 일찍 하더라.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어린이집에 들어서는데 어린이집 선생님이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마음이 복잡하고 착잡했다. 아니 솔직히 슬펐다. 아이를 붙잡고 내가 울고 싶었다. 핀란드어로 어린이집 생활을 한지 이제 갓 1년이 지나 다른 핀란드 아이들에 비해 핀란드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레오가 아이들 사이에서 다툼이 생겼나 본데 핀란드어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대 남자아이의 어깨를 물었다는 거다. 


다행히 치료를 받거나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고 물린 자국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하셨다. 다음날 레오 아빠와 함께 어린이집을 찾아가 상대 아이와 부모님께 함께 사과를 하고 아이들끼리도 화해하여 잘 마무리가 되었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이 일은 두고두고 내 안에서 트라우마가 되었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기억나냐고 물어보면 전혀 기억이 없다고 한다. 아이가 다툼이 일어난 그 상황에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답답한 심정을 생각하니 아이의 무의식 속에서 이 사건은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다행히도 감사하게도 아이는 지금까지 핀란드에서의 학교생활을 건강하게 잘해오고 있고, 사춘기도 특별한 어려움 없이 잘 보내고 있다.


무의식은 일반적으로 각성 되지 않은 심적 상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각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무의식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데. 첫째는 의식을 잃는 것을 뜻하며, 둘째는 어떤 것을 하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뜻하고, 셋째는 꿈이나 최면 혹은 정신분석에 따르지 않고서는 파악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상의 정신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마음의 심층을 뜻한다고 한다. 


'큰 상처'를 뜻한다는 라틴어 트라우마(trauma)가 생기면 추후 그것을 기억하건 하지 못하건, 그것은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어떻게 뿌리내려 정신적 외상을 일으킬까. 


2020년 이후 3년째 장기화된 세계적 팬데믹과 느닷없는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들은 이 끔찍한 인류 전체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시나브로 봄이 오고 있는데, 아침해는 점점 길어지고, 봄햇살은 아찔할 정도로 눈부신데, 하루 종일 숲 속에서 들려오는 서로를 애타게 찾는 희망으로 한껏 푸푼 행복한 새들의 지저귐은 맑은 공기를 가로지르며 허공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데, 마침내 백야의 하늘이 열리고 있는데..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핀란드에서는 이맘때 자살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기 전이던 시절의 인화된 사진들은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듯 아이의 냄새가 바로 옆에서 나는 듯 십여 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에서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고 또렷하게 기억을 떠오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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