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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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비에게 맞아 주었다. 주정뱅이 아비가 웃기고 가여웠다. 내가 자기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자랐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나는 그 사실이 웃겨서 얼굴을 가리고 맞으면서 흐흐흐 웃었다. 귀먹은 할머니가 요의를 느끼고 깼는지 방에서 나와 그 장면을 보았다. 한밤중의 구타 현장. 할머니는 아이고 아이고 이 소리만 연달아 했다. 혹시라도 주정뱅이 아들이 잡혀갈까 봐 경찰에 신고는 못한 채 말이다. 구타가 멈췄다. 아비가 할머니한테 성큼 다가가더니 할머니의 오른쪽 귀를 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할머니는 무기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할머니 귀가 먹은 게 저 인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의와 살의가 거의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늙어가는 아비를 손볼 때는 그야말로 손만 있으면 되는 는 거였다. 그런데 할머니가 짐승 같은 촉으로 내 계획을 알아챘는지 두 팔로 내 다리를 확 붙잡았다. 바닥을 빠른 손도로 기어와서 말이다. 나를 위한 동작이 아니다. 자기 새끼를 위한 할머니의 동작은 슬랙스틱코미디 그 자체여서 나는 실컷 비웃어주었다. 미친 짐승마냥 아비가 내 쪽으로 비틀 다가왔다. 나는 한 손으로 아비의 가슴팍을 밀쳤다. 아비가 쓰러지자 할머니는 두 팔로 내 다리를 더 꽉 붙잡았다.
아 좀 놓으라고!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할머니 팔을 뿌리쳤다.
거리의 어둠마저 나를 피하는 듯 피해 의식에 휩싸인 밤.
내가 살아있다고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했다.
나를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내가 먼저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독이 전해지지 않게 미소 지으며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중요한 일 아니면 나중에 통화하자. 급한 일이 생겼거든."
선생님이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목소리는 다급했다. 나는 괜히 무안해져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바로 통화를 끝냈다. 다음 날, 선생님은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은 잘 해결됐다면서 주말에 점심 먹으러 오라고 했다. 나는 안도했다. 다시 선생님이 전화를 해 줘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급하게 끝낸 통화가 마음에 걸려 일이 해결되자마자 나한테 전화했다고 생각하니 나는 기뻤다.
근처 꽃집에서 파란 수레국화 꽃다발을 샀다. 작은 꽃다발이었다. 선생님이 왜 이런 걸 사왔느냐고 하면 오렌지 주스 아니니까 괜찮지 않냐고 너스레를 떨려고 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환한 얼굴로 꽃다발을 받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선생님 급한 일이 해결됐다고 하니까 축하해 드리고 싶어서요. 수레국화 꽃말이 행복이래요."
"고마워. 스승의 날도 아닌데 제자한테 꽃선물을 받다니 행복한데. 우리 윤이 태명이 행복이었어."
선생님은 수레국화를 화병에 꽂아 거실 테이블에 두었다. 여전히 윤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식탁에는 윤의 몫까지 파스타 세 접시가 놓여 있었다.
"오늘은 윤도 같이 점심 먹기로 했어. 우리 윤이는 약속은 꼭 지킨단다."
선생님이 방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윤이 나왔다. 나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무기력하고 심드렁한 표정. 집 식탁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려면 약속 같은 것을 해야 하는 건가.
"저 수레국화 예쁘지? 글쎄 꽃말이 행복이래. 엄마가 말한 적 있지? 윤이 너 태명이 행복이었어."
윤에게 말을 거는 선생님이 안쓰러워 보였다. 선생님이 내가 사 온 꽃이라고 해도 윤은 시큰둥했다.
"얘들아, 어서 먹자. 트리플 풍기 파스타야. 입맛에 안 맞아도 참고 먹어. 양이 부족하면 말하고."
선생님은 애써 미소 지었다.
"잘 먹을게요."
낮은 목소리. 나는 윤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샐러드를 안 내놨네."
선생님은 저런 대답에 감동이라도 받아서 울컥한 걸까. 꼭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샐러드 핑계를 대고 싱크대에 간 것 같았다. 곧 선생님은 샐러드를 가져와서 토마토 카프레제 샐러드라고 했다. 와, 색깔이 예뻐요. 완전 맛있어요. 이런 리액션은 내 몫이었다.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 많이 먹어."
"선생님은 왜 안 드세요? 요리할 때 먹어서 배부르다 이런 말씀은 하지 마시고요."
"알았어. 먹을게."
세 사람은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나만 숨이 막힐 듯 불편한 자리였을까.
"손가락 괜찮니?"
선생님의 시선은 윤을 향해 있었다. 흘낏 보니 윤은 왼손 약지에 손가락 깁스를 하고 있었다. 윤은 파스타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너무 많아요."
윤은 파스타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싱크대에 접시를 두더니 이따 설거지하겠다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이한테 잘 먹겠다는 말을 들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윤이는 예의도 바르면서 할 말은 하는 아이였어. 한번은 깨끗이 다시 씻으라고 했더니 윤이 뭐라고 했는 줄 아니? 책 보고 안 건데, 엄마는 결벽증이야. 나 방금 씻고 나왔는데 왜 또 씻으라는 거야. 인상을 이렇게 팍 쓰면서 말했단다."
선생님이 얼굴을 찌푸리자 코에 주름이 생겼다.
"급한 일은 잘 해결되신 거죠? 선생님 목소리가 다급해서 저도 걱정되었어요."
나는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윤이 손가락을 다친 거야. 그런데 얘는 언제 어디서 다쳤는지도 모르는 거 있지. 약지가 부은 걸 내가 눈치 챘기에 다행이지. 병원에도 안 간다는 걸 내가 난리쳐서 겨우 간 거야. 너한테 전화왔을 때 정형외과 응급실로 가던 중이었어. 병원에서 인대가 손상됐대.길게 잡아 한 달 정도 손가락 부목 깁스를 하면 괜찮아질 거라는데 볼수록 속상해죽겠어. 아 참 그날 전화했지. 무슨 일로 전화한 거니.”
“별일 아니에요. 잠이 안 와서요.”
내가 십자기에 못 박힌 모습으로 찾아와도 선생님은 윤의 손가락에만 신경을 쏟을 것이다. 윤은 내가 아니며 나 역시 윤이 될 수 없다. 우리 사이에는 어떤 교집합도 없다. 우리는 악수도 할 수 없는 사이다. 한마디로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