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08
처음에는 윤이랑 잘 지내보려고 했다. 그게 선생님이 열일곱 살의 나를 주말에 집으로 초대한 목적일 테니까. 나는 입고 갈 옷을 골라서 세탁기에 돌리고 직접 다림질까지 했다.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괜찮은 스포츠 브랜드의 티셔츠를 입고 선생님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근처 편의점에서 오렌지 주소까지 사서 나름의 예의도 갖추었다. 나를 맞아준 건 선생님이었다.
"고마워. 다음부터 아무것도 사 오지 마. 우리 윤이가 집에 올 때 예의 차려서 뭘 사 오겠니? 앞으로 편하게 오란 뜻이야."
선생님이 오렌지 주스를 받아들며 말했다. 나를 윤과 비슷한 급으로 두고 비유했을 때 가슴이 두근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오후 3시에 애프터눈 티 세트 괜찮지? 너를 위해 만든 거니까 맛 없어도 다 먹어야 해."
식탁에는 홍차와 3단 접시에 비스킷, 샌드위치, 스콘 등이 놓여 있었다. 아, 이런 걸 애프터눈 티 세트라고 하는구나. 나는 속말을 삼키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윤이는 이따 나오겠대. 우리끼리 먹고 있자. 피아노 연주 들으며 먹을까."
선생님은 말하면서 휴대폰으로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했다. 익숙하지만 곡명은 알 수 없는 피아노 연주 음악이 나지막하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연주한 거야. 쇼팽 녹턴 20번. 윤이는 어릴 때부터 그림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에도 재능을 나타냈어. 선생님들마다 예술 영재라고 했으니까. 아쉽게도 그림은 안 남았어. 이 피아노 연주도 이렇게 듣는 거 알면 윤이가 싫어할걸. 그래서 볼륨을 낮춘 거야."
아마 윤은 자기 그림을 다 버린 것 같았다. 선생님은 그 부분에서 잠깐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타인이 칭하는 예술 영재 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태교 음악으로 클래식을 많이 들었어. 윤은 내 뱃속에 있을 때 음악을 좋아했어. 이렇게 배에 손을 대고 있으면 다 느껴졌단다. 혼자 윤이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윤이 피아노를 전공했다면 어땠을까. 미래에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지 않을까. 나도 참 어쩔 수 없나 봐."
"그렇게 될 수도 있죠. 잘하는 게 많으니까 고민도 길어지는 거 아닐까요? 고민이 끝나면 잘될 거예요."
"너한테 심리 상담 받는 기분이다. 우리 윤이랑도 잘 지내줘."
선생님의 당부를 모범생처럼 잘 따르겠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짐했다. 그래서 그날 윤이 끝내 나와 보지 않았어도 선생님의 부름을 받자마자 다시 찾아간 것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이상 뭘 사 들고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을 잘 실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 윤과 나는 식탁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지만 윤과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윤은 대부분 방에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에는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버렸다. 선생님의 당부는 조금 이상했다. 윤과 잘 지내라고 했으면서 굳이 윤과 나를 엮으려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