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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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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숫눈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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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첫 도벽의 추억. 그날 오후 아비는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잠바를 벗어던지고 바닥에 쓰러져 죽은 듯 잠들었다. 나는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바로 곯아떨어진 아비와 내팽개쳐진 잠바를 동시에 혹은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바 주머니에 지폐 모서리가 삐죽 나와 있었다. 어린 나에게 술 취한 아비는 숨 죽여 피해야 하는 대대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맞닥뜨리게 되면 아비가 잠들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한다. 괜히 피한답시고 움직이다가 재수 없으면 얻어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비가 곯아떨어지고 난 후에야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어린 나의 대처법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지폐의 모서리가 내 어린 욕망을 콕콕 찔렀다. 나는 조심조심 다가가서 손끝으로 지폐를 꺼냈다.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내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그 후 나는 대범해졌다. 아비가 술 취해 곯아떨어지면 스스럼없이 옷을 뒤졌다. 혹시라도 아비가 깨면 옷을 벗겨주려는 척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폐를 쥐어서 빼내려는 순간에 갑자기 아비의 오른손이 내 뺨을 갈겼다. 나는 바로 쓰려졌다. 아비는 내 작은 몸을 흠씬 두들겨 때리면서 또 어떤 놈팽이와 도망가려고 이 말을 역하게 내뱉었다. 안 도망간다고 외쳐 봤자 먹히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서 머리와 복부를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었을 때 나는 온힘을 다해 아비를 밀치고 집 밖으로 나갔다. 도망 나와서 흐흐흐 웃었다. 대단한 상상을 하기 있었기 때문이다. 정육점에 있는 육절기로 아비의 손발을 싹둑 자르는 상상. 댕강, 수족이 잘려나간 아비는 비로소 비폭력 인간이 된다. 아비의 몸을 육절하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해맑아진다. 댕그렁, 댕그렁, 성당의 종소리가 어둠을 은은하게 밀어냈다. 나는 어리고 약한 인간답게 종소리에 이끌려 성당 앞으로 갔다. 어둠 속에서 하얀 성모상이 보였다. 성모상이 내 상상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성모상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듯한 그 순간에 나는 뒤돌아 비탈길을 내려갔다. 

  다음 날 찾아가 보니 오후의 빛 속에서 성모상은 평범해 보였다. 성상 아래에 성경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문구를 보자 죄를 짓고 싶어졌다. 나는 더 이상 아비의 푼돈을 훔치지 않았다. 동네 슈퍼 주인은 기형 물고기처럼 등이 굽은 노파였다. 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는 건 도벽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웠다. 겁이 많고 어눌하게 말하던 그 아이와는 사이 좋게 용돈을 나누기로 했다. 물론 내가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노을이 걸린 저녁 노파의 슈퍼에 불이 난 건 내 탓이 아니다. 그 아이가 학급의 그림자처럼 지내다가 전학 간 것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죄를 지으면 성모상 앞에 가서 조문하듯 꾸벅 고개를 숙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성모는 인간이 어떤 죄를 지어도 고백하면 용서한다. 어린 마음에 성모상에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완벽한 어른, 성모는 자기를 때리고 찌른 아이 같은 건 한방에 용서할 테니까. 선생님이라면 어떨까. 창가에서 벚꽃을 바라보던 선생님, 잿빛 공기가 감도는 교무실에서 가만 내 손을 잡아 주던 선생님, 하나뿐인 아들의 세계에 나를 초대한 선생님. 선생님은 내 고백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어린 날의 도벽 따위를 고백하려는 게 아니다.   

  자취방 건물 앞에서 택시를 탔다. 목적지로 선생님댁 동네 이름을 말하자 택시는 바로 출발한다. 나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고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고백을 시작해야 할까. 선생님으로부터 윤의 부고를 전해들은 그날부터 시작할까. 그날 밤, 나는 봄밤을 걸어 유년시절 이후 발길을 끊은 성모상 앞에 서 있었다. 아무리 어둠이 가리고 있어도 그 메시지는 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아저씨, 이 말 어떻게 생각해요?”

  성모상 받침돌에 있던 그 문구를 나는 툭 던진다. 둥글게 휜 기사의 양 어깨를 바라본다. 죄의 무게를 가늠해 보려는 듯 한껏 눈을 찡그린 채로  

   “술 먹고 전도하지 마쇼. 나는 무교요.”

   “사실 저도 무교예요. 흐흐흐.”

   아무 것도 몰라서 그 무엇도 믿지 않는 것처럼 나는 웃는다. 웃음을 멈춘 건 차창으로 내 얼굴이 비스듬히 비쳤기 때문이다. 어두운 내가 웃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보지 않아도 내가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있다. 택시는 옥상 경관 조명이 화려한 뉴타운 아파트 단지를 옆에 끼고 주행 중이다. 아니 나는 모른다. 술기운이 사라지고 푸른 빛이 거리에 얇게 깔리면 나는 고백 따위는 모른 척할 수도 있다.   

  그 전에 해야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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