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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향 Sep 07. 2019

자본주의와 복지국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요즘 빠진 책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 앞에 자주 가던 카페에서 우연히 발견한 배우 김혜자의 유명한 저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몇 개월 전인데 카페에 갈 때마다 틈틈이 읽다 보니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혜자가 일생을 바쳐온 아프리카 난민 구제활동은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지점을 훨씬 뛰어넘는다. 대량 살상을 묘사하는 내용의 끔찍한 장면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고통받았다. 오열하고 분노하고 혼자 중얼대다 책을 집어던지고 밤잠을 못 이뤘다. 남편이 차라리 책을 그만 읽으라고 화를 낸 적도 있을 정도다.


  기억나는 몇 가지 충격적인 에피소드를 꼽으면 어린 소년 군인들이 자기보다 더 어린아이와 여자들의 손목과 발목을 자른다. 그런데 몇몇은 무딘 칼날로 인해 제대로 안 잘린 손목 발목을 대롱대롱 달고 다니다가 바위 등에 갈아서 떨어뜨린다.

  열실 남짓 된 소녀가 군인들에게 집단 윤간을 당하고 눈앞에서 부모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며 기절한다. 정신이 깨어났을 땐 군인 대장의 몇 번째 첩으로 끌려가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삶을 산다. 스무 살도 안된 아이가 어린 자녀들을 줄줄이 키운다.

  소년병들이 이런 미친 짓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마약 때문이다. 강제로 투약한 마약에 의해 살상과 윤간을 저지르고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떤 생각조차 할 능력이 없다. 김혜자가 인터뷰한 한 소년병 출신의 청년은 "나쁜 짓을 한 건 후회하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군인이 될 것 같다. 먹을 것을 주니까."라고 말했다.

  세계지도에 없는 나라, 국경도 없고 나라라고 부를 수도 없는 무법지대 아프리카 소말리아에는 생각보다 많은 아이와 아기가 살고 있다. 경찰이나 국가권력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유롭게 길을 걷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김혜자는 소말리아에서 무기로 무장한 경호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움직였다.


  이 책의 주제는 그래서 얼마나 더 놀랍고 무서운 경험을 했는지가 아니다. 김혜자는 책에서 "전 세계 부자가 나누면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의 굶어 죽는 아이들을 평생 먹일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경제지 기자로 13년간 월급을 받으며 커리어를 쌓았다. 이 월급 덕분에 나와 가족의 생계를 지킬 수가 있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한편으론 사회주의가 아닌 완전 복지국가를 추구하고 지지한다. 하지만 전 세계 부자가 그 많은 난민들을 살릴 수 있다는 통계가 있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자본주의를 혐오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부모의 보살핌 속에 자라야 할 소녀들이 마른 젖을 갓난아기에게 물린 채 배고픔에 쓰러진다. 도저히 먹일 방법이 없어 태어난 지 며칠 된 아기에게 독초를 먹여 죽인다. 빵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선 틈바구니에 배고픔을 못 이겨 쓰러진 아이가 있고 그 아이에게 자기의 빵을 손으로 잘라서 입에 넣어주는 형이 있다.


  베이비시터나 부모님의 도움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하는 나름 힘든 삶을 사는 나도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하루하루 견디는 고통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하찮은 것이 된다.

  결혼 전과 결혼 후 두 번 서울역 장애아이 복지기관인 가브리엘의 집에 가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삶의 가치와 불평등 앞에 숙연해졌다. 그런데 제3세계를 알고 나선 장애조차 작게 느껴졌다. 살면서 아프리카를 갈 기회가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김혜자가 우연히 봉사활동에 갔다가 전 세계를 떠돌게 된 이유는 공감이 됐다. 우리 모두 알지만 현실의 많은 문제들 때문에 실천하지 못할 뿐이다.


  이 책은 2004년에 쓰였다. 15년이 지난 아프리카는 어떤 모습일지, 조금의 발전이 있었는지 몰라도 여전히 국제사회는 전쟁을 막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듣는다.

  인간은 지구를 이루는 생명체 중의 하나일 뿐. 새와 물고기, 수많은 동물이 국경과 아름다운 아프리카 땅, 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오직 인간만이 선을 긋고 필요 이상의 것을 강탈하기 위해 무기를 사용한다. 문명의 발달로 많은 것을 이뤘지만 다시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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