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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PHYSIS Mar 12. 2022

아이의 감정이 자랄 때

부모는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

아들은 요즘 집 안에서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든 아빠든 상관없는 것 같다. 무섭단다, 자꾸. 환한 대낮에도 “엄마 옆에 있을래” 하며 요리하는 옆에 앉아 논다. 악몽도 종종 꾸고 무서운 상상도 자주  하나보다. 집에 갑자기 원숭이 괴물이 나타나 자기를 잡아갔다며 갑자기 운다. 어릴 때는 캄캄한 방도 잘만 들어갔는데, 좀 크니 이런저런 상상도 함께 자라는지 자기 생각에 갇혀 더 무서운 감정이 드나 보다.


가끔, 나처럼 못된 엄마 밑에서 어찌 이리 착한 애가 태어났나 싶은 마음이 들만큼 아들은 감동적인 말을 자주 한다. 우리 엄마 말이야. 우리 엄마처럼 그대로 해줘. 우리 엄마 목소리가 좋아. 계속 안고 자고 싶어. 내가 도와줄게. 엄마 내가 들게 이 가방은. 엄마가 힘들까 봐. 엄마 사랑해. 기록으로 남기지 못해 아쉬울 따름.


이리 써놓고 보니 웃긴데, 실은 아들은 아빠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아빠한테는 더 한다. 하긴. 지난 일 년간 아들은 아빠와 한 시간이 더 많았으니 이해는 하지만… 아빠와 자는 날은 웃고 있고 나와 자는 날은 표정이 사무적인 건 너무했다. 지난 일 년 간의 시간만큼 채워야 할 부분이 많으리라. 아빠를 더 찾으니 편할 때도 많지만.


아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단지 몸의 성장뿐 아니라 아이의 그런 감정 변화를 보는 일이다. 감정도 생각도 몸의 성장보다 훨씬 빠르게 자라는 것 같다.


오늘은 아들이 “몇 살부터가 어른이야?”라고 묻길래 조금 당황했는데, 요즘 부쩍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는다. 일단 스무 살이라 해두자. “20살!?” 아들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자기는 어른이 되기 싫다고 한다. 엄마 아빠가 일로 힘들어하는 것을 자주 본 탓일까. 자신은 매일 계속 놀고 싶은데, 어른이 되면 일하러 가야 하니까 그게 싫다고 한다.


아.. 우리가 뭘 보여준 거지. 어른이 되기 싫다니. 난 어렸을 적 그리 행복한 기억이 없고, 단지 그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믿었거나 혹은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던 것도 같고. 근데 아들은 그와 반대이니, 지금이 행복하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아님 우리가 어른으로서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걸로 받아들여야 할까.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는 말을 워킹맘일 땐 여러 번 들었고, 거기서 위로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부모의 앞모습 역시 밝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다 보고 있다. 앞모습 역시 밝으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며 육아와 내 삶을 따로 놓지 않고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육아에 있어 갈림길을 마주할 때 내게 가장 도움 되는 말이 있다. 부모가 바르게 살면, 자식도 바른 인생을 산다는 말. ‘바르게, 바른’에는 어떤 형용사도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행복하게, 행복한 같은. 하나 예외는 ‘열심히’다. 나는 열심히 살아야겠지만 아들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


어쨌든 부모가 제대로 된 사람이어야 아이도 그렇게 자란다는 말은 예외 없다. 육아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늘 그런 자기 검열에 빠지는 순간을 마주해야 하는 것. 내가 제대로 되려면 죽기 직전에서야 그에 조금은 가닿을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나마의 작은 빛은 그렇게 매일 나아지려고 애쓰는 제일 좋은 동기가 바로 자식, 육아라는 것이다. 아주 가끔은 대충 살다 죽는, 속 시원한 상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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