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진실 하나가 삶을 흔들다
죽음, 그 작은 진실 하나가 삶을 흔들었다.
어떤 진실은 인생을 뒤집어놓을 만큼 크지 않다.
하지만 아주 작은 진실 하나가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면, 그 파문은 결국 삶의 전부를 흔들어놓는다.
작은 진실은 늘 조용히 온다. 창호의 죽음도 그랬다. 그날, 그의 부재는 내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지만, 정작 내 마음을 끝내 붙잡아둔 것은 아주 익숙한 한 문장이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너무 익숙해서 수없이 스쳐 지나갔기에 당연해져버린 말. 늘 삶의 주변부에 밀려나 있던 말. 하지만 그날만큼은 이 한 문장이 돌처럼 내 마음 한가운데 툭 떨어졌다. 말의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 겨냥하고 있던 ‘삶, 그 자체’가 갑자기 또렷해진 것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나는 멈춰버렸다. 몸은 여전히 움직였지만, 마음은 멈췄다. 멈춰버린 마음이 두려워 나는 오히려 더 바쁘게 움직였다. 머릿속을 소음으로 채우고, 해야 할 일을 모조리 붙잡으며, 정작 마주해야 할 슬픔을 빙 둘러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은 고요했다. 그 고요 속에서, 한 사람의 부재가 남긴 빈자리를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빈자리라는 것은 이상한 힘이 있다. 그 자리가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서 더 크게 느껴진다. 그가 빠져나간 자리는 단순히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나를 다시 끌어당기는 검은 구멍 같았다.
죽음은 너무도 거대했다. 쌓아온 것들이 한 순간에 무의미해지고, 일상의 모든 풍경이 낯설어졌다. 누군가의 부재를 견디는 법은 어떤 책에도, 어떤 조언에도 없었다. 그저 흔들리고, 헤매고, 시간이 조금씩 마음을 다독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이 마음이 진정될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네가 없는 하루가 온전히 나의 일상이 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죽음.
나는 그 앞에서 내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사람들의 기대, 나에게 씌운 역할, ‘잘해야 한다’는 오랜 강박들,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희미한 약속들.
나에겐 언제나 내일이 있을거라며 내 삶을 송두리째 속이던 거짓말이 죽음의 진실 앞에서 빛으로 드러났다. 처음엔 그것들이 무너지는 게 두려워 더 세게 붙잡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것들은 손아귀에서 더 쉽게 부서져 나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손끝에서 힘없이 빠져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 전부야.”
그 한마디는 아주 작은 속삭임에 불과했고, 특별한 위로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 조용히 울려퍼진 그 한마디는 이상할 만큼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흔들었다. 그렇게 내 존재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내가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을.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나는 너무 많은 역할을, 너무 오래 연기해왔다는 것을.
죽음은 그 가면을 단번에 벗겨냈다.
남겨진 것은 꾸밈없는, 아주 작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 작은 나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부족하고 흔들리고 불안정한 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은 처음으로 ‘나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나가 아니라, 내가 오래 지켜온 작은 진실이 깃든 나.
죽음이 무너뜨린 것은 내 삶의 외벽이 아니었다. 대신 내 안에서 아주 오래 닫혀 있던 문을 조금 열어놓았다. 그 문틈 사이로 작은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내 삶을 조용히, 천천히 바꾸어놓았다.
‘완벽한 나’를 연기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느라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로 했다.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보다, 지금 이순간의 나를 먼저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 내게 남겨준 진실을 끝내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그래서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전부다.
11월 9일, 창호의 기일이 조금 지났다. 이젠 함께 술 한 잔 기울일 수 없지만, 기도 속에서 나는 여전히 그를 만난다. 그리움에 길을 내어 그를 기억한다. 그리움은 때로 아프지만, 그 아픔마저도 이제는 내 삶의 결을 이루는 한 부분이 되었다.
나는 믿는다. 언젠가, 이 작은 진실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걸어낸 시간들 끝에서, 그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고. 그 믿음이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해준다.
작은 진실 하나가 내 삶의 중심축을 바꾸어놓았다. 그 흔들림 끝에서 나는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으로 시작된 물음은, 더이상 정답을 찾는 물음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여정은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나는 오늘도 나를 향해 작은, 그러나 꾸준한 걸음을 내딛는다. 언젠가 죽음 앞에 섰을 때, 나는 아주 작은 나의 모습 그대로, 이 모든 여정을 잇는 기억을 간직한채로 마지막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
작은 진실 하나가 내 삶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은 나를 비로소 살아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