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아직 놓지 마, 함께 가보자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더라도, 흔들릴 것을 알면서도.

by 메리힐데

아침에 눈을 떠 창틈 사이로 바라본 오늘의 세상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하룻밤 사이 다른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것처럼 낯설고도 고요하다. 밤새 눈은 아무 말 없이 세상을 덮었고, 그 흰 침묵 위에서 시간마저 숨을 죽였다. 미세한 기척만이 남아, 아직 완전히 시작되지 않은 아침을 알린다. 옷장 문을 열고, 나는 온통 순백의 풍경으로 들어간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눈송이 사이에서 흐릿해진 아침, 도로를 채우던 소음과 사람들의 발자취는 눈 아래 깊이 묻혔다. 아직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길은, 막 펼쳐진 종이처럼 나를 기다린다. 집 안은 숨소리마저 포근하게 감싸는 고요로 가득 찬다. 난방이 돌아가는 낮은 울림, 컵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한 김. 이 아침이 아직 나만의 시간이라는 신호다.



"세상이 이렇게 조용해질 수 있다니. 눈이 이렇게 많은 것을 덮어줄 수 있다니. 오늘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 아침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게 된 건, 마음이 자라는 속도가 남들과 조금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 사이에 서의 나는 늘 흐름을 읽으며 움직였다. 파도에 쉬이 몸을 맡기지 못하는 사람처럼. 대화의 속도에 발을 맞추고, 웃음의 온도를 헤아리며, 너무 튀지도 가라앉지도 않게 나를 조절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집에서야, 마음은 외투를 벗듯 느슨해졌다.


혼자 남은 공간에서 흩어졌던 생각들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들. 오롯이 나만 알고 지나가도 되는 순간들이 조용히 쌓인다. 그 순간들은 외로움을 고요로 바꾸는 작은 다리가 되어준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아도 이 하루를 건너갈 수 있을 만큼, 나 역시 고요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진다.



혼자일 때만 들리는 소리들도 있다.

카페 창가에 앉아 흘려보내는 소음, 컵과 접시가 맞닿으며 내는 숨소리, 스푼이 잔을 스치는 작은 종소리.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지는 바람의 낮은 진동, 창밖에서 멀어지는 발자국의 잔향.

의자에 몸을 맡길 때 나는 미세한 마찰음, 책장이 넘어가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 잠시 멈췄다 다시 이어지는 숨.

아무 말 없이 남겨진 침묵, 그 사이를 천천히 흐르는 마음의 속도.

얼음 아래에서만 움직이는 물소리.

겉으로는 고요한 채, 안쪽에서만 이어지는 움직임.

앞서 가지 않는 시간,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

여기, 지금, 이 순간.


그 소리들 사이로 마음의 속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만의 시간은 스스로를 가장 솔직한 상태로 돌려놓는다. 누가 보고 있지 않으니 괜찮은 척 애써 웃을 필요도 없고, 마음을 그럴듯한 문장으로 다듬을 이유도 없다. 흐릿해도, 구겨져 있어도, 오늘의 나를 그대로 두는 시간. 외로움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회복에 가까운. 도망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방식이다.


다시 걷기 위해 잠시 눈을 감는 시간이 된다. 그 안에서 움켜쥘수록 더 얽히던 생각이, 숨을 고르기 시작하는 듯했다.


시간 속에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어느새 내가 손에 꼭 잡고 있던 문제들은,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저 멀리로 떠나간다. 어떤 일은 애초에 나의 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어떤 걱정은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끝까지 남은 바람만이, 겨울 끝의 나무처럼 또렷이 선다.


"아직 놓지 마, 함께 가보자"


말 대신 감각이 속삭인다. 보여주고 싶은 얼굴, 지켜야 할 역할들이 눈처럼 녹아내린다.






아침의 고요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을 덮었던 흰빛은 물이 되어 길 가장자리로 스며들었다. 젖은 아스팔트, 서로의 흔적을 덮어쓴 발자국들.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각자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고요는 늘 그렇듯,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마음속에서만 허락되는 손님처럼. 떠났지만, 코트 안감에 남은 찬 공기처럼, 마음 안에 얇게 남았다.


혼자 있는 시간은 끝난다기보다, 접힌다. 조용히 접혀 가방 안에서 다음을 기약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안의 눈빛들, 인사처럼 던져지는 짧은 말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설명과 끝내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 사이로.


침묵이 표지가 되어, 앞으로 걸어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내가 오래 머무는 자리,

쉽게 흔들리는 순간,

기쁨과 피로의 경계.

숨겨두었던 편지들이 고요 속에서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문턱을 넘는 일과 닮았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안과 밖이 분명하지만, 한 발을 들이는 순간 경계가 흐려지는 마법의 경계. 인사와 안부, 적당한 웃음이 오가고, 말은 안전한 온도로 조절된다. 그 사이에서 마음은 절반쯤만 밖으로 나온다.


진심과 예의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으며, 혼자 있을 때는 분명했던 감정들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연기처럼 흩어진다. 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놓으면 어디선가 희미하게 남아, 눈 녹은 자리에서 제멋대로 갈라져버린다.


우리는 종종 엇갈린다. 같은 말을 듣고도 다른 의미를 품고, 같은 순간을 지나 전혀 다른 마음으로 돌아선다. 이해하려 애쓸수록 오히려 더 멀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묻게 된다.


"관계란 과연, 가까워지는 일일까, 아니면 다름을 견디는 일일까."






오해는 늘, 갑자기 쏟아지는 눈보라처럼 나를 덮치곤 했다.

하지만 그 폭풍 속을 들여다보면, 이해의 시도들이 조금씩, 켜켜이 쌓여 있었다.


한 박자 늦은 대답, 스쳐간 시선, 말이 되지 못한 침묵이 틈새를 만들었다.

흐린 구름의 모양으로 어둔 그림자를 드리우며, 눈이 녹아 생긴 얇은 얼음 뒤에 숨어서.

밟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고, 미끄러진 뒤에야 존재를 알게되는, 숨은 그림자.

우리는 그 작은 균열 위에 각자의 해석을 얹고, 마음을 다치고 만다.


혼자 있는 시간은 우리의 등을 밀지도, 방향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다만 불을 낮춘 방 안에서 천천히 켜지는 촛불처럼, 우리의 자리를 가만히 밝힌다. 숨기고 싶었던 표정도, 애써 접어두었던 마음도 그 빛 아래에서만큼은, 더 이상 '틀린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가르지 않은 채, 그대로의 나를 놓아둔다. 판단 대신 온도를 남긴다. 그 온기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마주할 준비를 한다.


어쩌면 관계는 고요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를 통과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인지도 모른다. 혼자 있을 때 다듬은 마음을 가지고서야, 비로소 누군가의 마음 앞에 서는 일. 그래서 나는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지나, 다시 사람들 속으로 향한다.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더라도, 흔들릴 것을 알면서도.




"이번엔 괜찮을까?"

"그럴 리가.. 우리는 또 이해 대신 오해를 먼저 하게 될 거야. 눈 위에 찍힌 첫 발자국은 잠시 아름답겠지. 그치만 그 위로 발자국이 겹치고, 다시 눈이 녹고, 결국 그 자리는 맑지 않은 물로 남을거야. 처음의 흔적은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우리 앞에 남는 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질척임이겠지. 그래도, 그게 사람의 이야기 아닐까. 눈이 녹은 자리마다 서로 다른 보폭이 포개지고, 그 위에 시간이 쌓이는 일."




사람은 다시 다가가고, 사랑은 늘 무모한 선택처럼 찾아온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이해해 보려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일. 그 방향은 대체로 낯설고, 종종 춥기도 하다. 상대의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내가 알던 것과 다르고, 그 다름은 생각보다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사랑은 끌고 가는 힘이 아니라, 나란히 걷는 속도인걸까.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거리에서,

불에 달군 듯 뜨겁지도, 얼음처럼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서로에게 오래 쥐고 있어도 아프지 않은, 온기가 되어주는 것일까.


고요를 잃지 않으면서 관계를 선택한다는 건, 마음에 무리한 힘을 주지 않는 일이다.

나의 결을 기억한 채, 그 위에 사랑하는 이를 살포시 얹는 것.


전부를 내어주지도, 단번에 문을 닫아버리지도 않는 거리,

그 사이에서 관계는 숨을 고른다.





"모든 오해가 풀리는 날이 과연 올까? 어떤 마음은 끝내 말이 되지 않고, 어떤 진심은 상대의 언어로 옮겨지지 못한 채 남을지도 몰라. 어쩌면 끝까지, 오해라는 이름으로 머무를지도.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이 헛된 건 아니잖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오해를 한 거야, 그 안에는 분명 다가가려는 마음이 있었어."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만난 고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무게. 이들을 관계 속에서도 놓치지 않았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의 오해는 이미 이해를 향해 걸어간 흔적이 되었으니까. 사랑이 지나간 자리처럼."



눈이 녹은 길 위에는 이미 수많은 발자국이 겹쳐 있다. 어디까지가 내 흔적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속도를 늦춘다. 한때 아무도 걷지 않았던 마음속 눈밭을 떠올리며, 다시 나의 보폭을 찾아본다.


관계란 같은 속도로 걷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속도를 허락하는 일임을 기억하기 위해서.






눈은 곧 모두 녹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모두 녹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직 밟히지 않은 새하얀 눈밭의 자리가 남아있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필요 없던 자리. 우리는 그 여백을 품은 채 사람들 사이를 걷는다. 완전히 섞이지도, 완전히 물러서지도 않은 채.


관계는 여전히 어렵고, 오해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사랑은 여전히 나를 시험한다. 마른 길 위를 걷다가도 문득 발밑에 아직 녹지 않은 차가운 감각을 느낄 때면, 그것은 상처의 기억이기도 하고, 고요의 잔향이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마음속 한편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남겨두고 산다. 누구를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곳은 소음이 닿지 않는 자리이고, 이해받지 못해도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숨 쉴 틈이다.



"어쩌면 사랑이란, 눈이 쌓이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닐지도 몰라. 이미 녹아버린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발자국을 남겨보는 용기인 것 같아. 남지 않을 발자국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완전히 안전하지 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모든 걸 알면서도, 사랑하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배우는 중인 것이 하나 있다.

오해 앞에서 바로 돌아서지 않는 법,

이해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 사랑,

그리고 고요를 품은 채 다가가는 걸음.


눈이 쌓였던 아침은 지나가고 다시 복잡해진 길 위에서, 고요가 남긴 순백의 눈밭이 우리를 부른다. 작지만 깊은 울림으로.


그 눈밭이, 아직 우리 안에 숨 쉬고 있다.

작고 단단한 사랑, 그 안에서 우리는 고요를 품은 채 손을 내민다.


오늘 문득 고요가 필요하다면, 그건 아마 마음이 자라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말없이 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고요는 눈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 안에 쌓인다.


그렇게 청량한 아침 공기 속에서, 아무도 걷지 않은 내 마음의 눈밭 위에 조심스레 나의 첫 발자국을 찍어본다.


"모든 오해가 풀리는 날이 과연 올까? 어떤 마음은 끝내 말이 되지 않고, 어떤 진심은 상대의 언어로 옮겨지지 못한 채 남을지도 몰라. 어쩌면 끝까지, 오해라는 이름으로 머무를지도.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이 헛된 건 아니잖아. 이해가 안 돼서 오해를 한 거야, 그 안에는 분명 다가가려는 마음이 있었어. 중요한 건, 그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았다는 거야. 혼자 있는 시간에 침묵 속에서 건져 올린 고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무게를 관계 속에서도 놓치지 않았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의 오해는 이미 이해를 향해 걸어간 흔적이 되었으니까. 사랑이 지나간 자리처럼."
"어쩌면 사랑이란, 눈이 쌓이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닐지도 몰라. 이미 녹아버린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발자국을 남겨보는 용기인 것 같아. 남지 않을 발자국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야. 완전히 안전하지 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모든 걸 알면서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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