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하늘을 회색이 아닌, 우산의 오색빛으로 물들여본다.
비가 오기 직전, 묘한 공기가 날 머무름 속에 가둔다. 아직 젖지 않았는데도 이미 젖어 있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면 마음부터 먼저 눅눅해진다. 창밖의 하늘은 결정을 미루는 얼굴로 오래 머뭇거리고, 가로수 잎들은 말이 걸릴 것을 예감한 사람처럼 잔뜩 몸을 웅크린다. 그런 날이 있다. 혼자여도 되는 날이 아니라, 혼자일 수밖에 없는 날.
비는 늘 예고 없이 시작된다. 사소한 첫 방울로. 유리창에 맺힌 작은 점 하나, 우산을 펼치기도 애매한 정도의 망설임. 그러나 잠시 후 그 점들은 서로를 부르며 늘어난다. 서로의 등을 떠밀듯 떨어지는 빗방울들 사이에서, 거리의 소음은 천천히 흐려지고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둘 표정을 잃는다. 각자의 우산 아래로 접혀 들어간 표정들. 그 아래서 사람들은 모두 혼자인 것처럼 걷는다.
그날의 외로움도 그런 식이다. 대단한 사건은 없다.
다만, 딱 한 마디, 단 한 마디가 오지 않는다.
전화는 울리지 않고, 메시지는 읽히지 않으며, 나를 향해 열려 있을 거라 믿었던 문들은 생각보다 무겁게 닫혀 있다. 가족도, 친구도, 스승도, 그리고 끝내는 내 편이라 부르던 이름 하나까지. 가까이 있다고 믿었던 온기들이 사실은 각자의 방 안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다시 한번, 서럽고 아픈 계절이구나."
비는 땅에 닿자마자 방향을 잃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흩어지고, 낮은 곳으로만 흘러간다. 나도 그날은 그런 빗물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낮은 생각들로만 흘러가곤 한다.
“아, 혼자였구나.”
짧지만 강한 한 문장이 머리로 떠오르기보다 몸으로 먼저 내려앉는다. 어깨가 축 처지고, 발끝이 괜히 무거워진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비에 젖은 사람처럼 괜히 초라해진다.
온통 회색으로 덮인 하늘은 해를 가려버렸다.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다. 밤이 되면 빗소리는 더 분명해진다. 낮에는 소음에 섞여 사라지던 소리가, 어둠 속에서는 또렷하게 들린다. 창틀을 두드리는 일정한 리듬,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간격. 잠을 청하려 눈을 감으면, 그 소리들이 생각의 문을 하나씩 두드린다.
지나간 말들, 받지 못한 위로들, 끝내 묻지 못한 질문들.
외로움은 그렇게 밤마다 방문객처럼 찾아와, 아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버린다.
"단 한 번쯤은, 이런 서러운 계절을 건너뛰게 해 줄 수는 없을까요? 비가 오지 않는 여름처럼, 마음이 젖지 않는 밤처럼.."
그러나 현실의 계절은 늘 정직해서, 비를 생략하는 법을 모른다. 젖지 않으려 애쓸수록 옷자락은 더 무거워지고, 피하려 할수록 발밑에는 물웅덩이가 늘어난다.
어디선가, 오래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보다 낮은, 익숙한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 모든 것을 파괴하지는 않는단다. 오래된 먼지를 씻어내고, 말라붙은 땅을 적시는 중이지. 빗속을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젖는 것이 두렵지 않은 순간이 온다는 걸 아니? 이미 충분히 젖었다는 사실이, 이상한 담담함으로 바뀌는 때가 있어. 그때 우리는 비를 맞으며 걷는 법을 배운단다. 다른 누군가의 우산이 없어도, 나 자신의 발걸음만은 멈추지 않는 법을."
다음 날 아침, 비는 흔적만 남긴 채 물러간다. 물웅덩이 위로 희미한 하늘이 비치고, 젖은 아스팔트는 빛을 오래 붙잡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다시 걷고, 도시는 다시 소음을 회복한다. 어느 순간 기척도 없이 하늘은 파란빛을 회복했고, 해는 눈 부시게 떠오른다. 비 오는 날을 지나온 동네에는, 설명할 수 없는 단단함이 남았다.
혼자였던 날들은 그렇게 마음의 어딘가에 고인다. 필요할 때 꺼내 마실 수 있는 물처럼, 혹은 다시 비가 올 때를 견디게 하는 기억처럼.
"괜찮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하나도 괜찮지 않을 거야.."
언젠가 같은 비를 맞고 서 있는 누군가를 본다.
말없이 다가가 우산을 펼친다.
처음 보는 사람의 곁에서.
어깨가 닿을 듯 말듯한 애타는 거리에서,
그의 하늘을 회색이 아닌 우산의 오색빛으로 물들여본다.
"괜찮아요?"
"아니요,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눈을 마주치고는 처음 본 사람 둘이 피식 웃는다. 지금 이 비가 아프고 서러워도, 그 속에서도 끝내 걷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오늘도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나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잠시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본다.
혼자라는 말이 더 이상 공포가 아니라, 하나의 날씨처럼 느껴질 때까지.
"혼자라는 깨달음은 소리가 없이, 몸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스며오곤 해요. 뼈에 닿는 냉기처럼, 이유 없이 서러운 통증처럼요. 그날은 특별한 불행이 없어도 유난히 무거워요. 길을 걷는 발걸음이 늦어지고,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말들이 오래 머물기도 하고요. 밤은 괜히 길어지고, 불을 끈 방 안에서 생각은 끝없이 불어나요. 단 한 번이라도, 이런 계절이 스치듯 지나가 주면 안 될까. 단 한 밤이라도, 외롭지 않게 잠들 수는 없을까. 그런 소망이 쌓여 억울하기까지 하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 외로움의 중심에서 제 자신을 만나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스스로 부르며, 아무도 안아주지 않는 등을 스스로 기대며, 그렇게 하루를 버텨요. 버려진 줄 알았던 순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다 지쳐 멈춰 울던 그 자리에서, 제가 우산을 씌워주더군요. 어쩌면 외로움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찾아오나 봐요. '난 네 편이야' 말해주기 위해서요"
아픈 계절은 묻지 않고 찾아오지만, 그 계절을 건너는 발걸음은 내 것이 된다.
서럽고 저린 날들을 안고서도 걷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몸이 먼저 배운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외로움 앞에 선 누군가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알게 되지 않을까.
그 한 마디가 왜 그렇게 간절했는지,
그리고 왜 그 말을 결국 내가 나에게 먼저 건네야 했는지를.
그러니 오늘도 조용히 말해본다.
또 한 번 서러운 계절 속을 지나는
단 한 사람에게,
"난 네 편이야."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 외로움의 중심에서 제 자신을 만나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스스로 부르며, 아무도 안아주지 않는 등을 스스로 기대며, 그렇게 하루를 버텨요. 버려진 줄 알았던 순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다 지쳐 멈춰 울던 그 자리에서, 제가 우산을 씌워주더군요. 어쩌면 외로움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찾아오나 봐요. '난 네 편이야' 말해주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