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쩌면 더 크게 줄 수 있다고 믿어
겨울의 바람은 늘 같은 얼굴을 하고 찾아오지만, 차갑게 볼을 스치는 그 숨결 속에는 묘하게 사람을 잠시 멈춰 세우는 힘이 있다. 오늘도 그렇다. 퇴근 무렵, 도로를 가르는 차들의 붉은 브레이크 등은 얼어붙은 도시 위로 흩뿌려진 작은 성좌처럼 반짝이고, 그 사이를 스며드는 찬 공기는 폐 깊숙한 곳까지 투명하게 스며든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간다. 따뜻한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섞여 작은 안개처럼 올라오는 그 입구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전철을 기다린다. 스르륵 열리는 지하철 문, 인파 속으로 내 몸을 구겨 넣고 겨우 숨 쉴만한 공간에 바삐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본다.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카톡을 하며 피식 웃는 사람들.
“오늘도 잘 버텼구나.”
지하철을 타고 서서 가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 터널의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스쳐 지나가며 내 얼굴 위에 얇은 그림자를 덧칠한다. 눈길을 돌려 유리창 속 나와 마주한 순간, 창에 비친 내 얼굴이 참 낯설기도 하다.
피곤이 스며든 눈 밑의 잔들림,
말하지 않고 삼킨 생각들의 자취,
오늘 하루 쌓아둔 생각의 무게,
하루를 버티느라 조금 굳어진 입매까지.
모두 그대로 비친다.
달리는 전철 안에서 나는 잠깐 멈춘 듯한 정적에 빠져든다.
아,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건너고 있구나.
지금의 내가 이런 표정으로 하루를 건너고 있다는 사실이 '쿵', 마음에 내려앉는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틈새로, 창에 비친 나만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어떤 하루를 살아냈는지, 어떤 마음으로 견뎌왔는지, 그 흔적은 말없이 얼굴에, 몸에, 마음 깊숙한 곳에 조용히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자국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모양으로 남는 듯하다.
하루하루를 떠나보내면서 나는 지울 수 없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아도 괜찮은 것들이 있다는 걸,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상처는 때로 멍처럼 번지고, 때로 흉터처럼 단단히 남고, 때로 스치고 지나간 손톱자국처럼 금세 옅어지지만, 모양이 다를 뿐 그 모든 것이 나를 이룬다.
전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을, 그리고 그 얼굴 아래 살짝 남아 있는 작은 흔적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게 된다. 아마 나는 그 자국들을 인정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는 중인 것 같다.
그제야 비로소 하루의 무게가 살짝 풀리고, 숨이 천천히 깊어졌다.
어떤 기쁨들은 참 조용하게 찾아온다. 창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손짓하지도 않은 채. 그저 바람에 실려와 내 어깨 한쪽에 가볍게 내려앉는 온기처럼. 조금만 마음이 흐트러져도 놓치기 쉬울 만큼 작고 가느다란 빛처럼. 그러나 한 번 알아챈 순간 오래 머무는, 겨울날의 따스한 난로처럼.
묘하게도 그런 기쁨들은 가장 버거운 시기에 가장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 걸어가던 발걸음이 문득 멈춰지는 어느 순간, 바람의 온도가 아주 약간 달라졌다는 걸 느끼는 순간, 지는 태양이 어느 때보다 내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순간.
종종 가장 혼잡한 거리에서 사뿐히 조용한 얼굴로 다가온 조용한 기쁨은 어느 틈엔가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에 천천히 스며들어, 흐트러진 영혼의 가느다란 가지를 살며시 곧게 세운다.
누군가의 부드러운 한마디,
따뜻한 차 한 잔,
지친 하루 끝에 스스로에게 건네는 “괜찮아”라는 짧은 숨.
그 모든 것들이 어느새 마음의 균형을 다시 맞춰놓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소하다’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영혼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로 하던 가장 얇고도 단단한 소소함,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빛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조용한 기쁨들을 자주 잊고 산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의미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차곡차곡 쌓여 있던 따스한 순간들을 손가락 사이로 새어버리듯 흘려보낼 때가 많다. 그러다 어느 날, 길가에 떨어진 햇빛 조각 하나가, 혹은 오래된 노래의 한 소절이 무심코 마음의 표면을 두드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기쁨을 이미 품고 있었음을 알려주려는 듯, 누군가 내 마음을 부드럽게 두드린다.
기쁨이란 결국 ‘갖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는 것’에 가까웠던 걸까?
기쁨은 크지 않아도 충분하다. 소란스럽지 않아도 괜찮다. 조용한 기쁨들은 천천히 스며들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물고, 더 깊게 뿌리내린다. 한 번 스쳐 지나가는 환희보다 나를 오래 지켜준 것은, 언제나 이런 은은한 온기들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더 또렷해지듯, 조용한 기쁨은 고요한 마음에서 가장 선명하게 빛난다. 조용한 기쁨들은 삶의 틈에서 피어난다. 빽빽한 하루와 무거운 마음들 사이, 아주 얇은 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처럼. 그리고 그 빛은 대개 조금은 상처받아본 사람들, 오랫동안 기다려본 사람들, 한동안 멈춰 서 있었던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가는 듯했다.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베풀 수 있듯, 많이 빼앗겨 본 사람도 많이 줄 수 있어."
"빛을 자주 보며 살아온 사람이 빛을 더 잘 알아볼 수도 있겠지. 그치만 평생 어둠 속이었던 사람에겐 빛이 처음 맛보는 장엄한 선물일 거야. 황홀함 그 자체겠지. 누가 더 많이 받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이미 내 안에 있는 걸 볼 수 있다면 말이야. 언제나 빛은 생각지도 못한 시간, 예견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거든. 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어. 그건 우리 안에 품고 태어나는 거니까."
"세상은 많이 받아본 사람이 더 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많이 빼앗겨 본 사람도 충분히, 아니, 때로는 더 크게 줄 수 있다고 믿어. 우리 모두가 갖고 태어나는 게 있으니까. 그걸 볼 수만 있다면 말이야."
흔들린 자리에 스며드는 바람처럼, 텅 빈 공간에 흘러드는 숨처럼. 조용한 기쁨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먼저 어루만진다. 나는 이런 기쁨을 어쩌면 또 놓쳐버리겠지만, 또 다른 날 문득 다시 만나게 되겠지. 기쁨이 언제 오는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 미세한 떨림을 감지할 수 있는 마음만은 어떻게든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저 멀리 밤거리가 보인다. 형광등 깜빡이는 가게들 사이로 김이 피어오르는 포장마차 냄새, 골목을 가르는 오토바이 소리, 사람들이 하루를 털어내며 흘러가는 웃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며 문득 생각해 본다.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잃었고, 오늘도 무언가를 얻었다고.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하루를 지나온 내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전철이 멈춰 서고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스며든다.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아까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표정, 어딘가에서 조용히 스며든 기쁨이 표정의 모서리를 아주 살짝 들어 올린다.
나는 그 얼굴에 천천히, 작게, 미소를 그려 보인다.
그리고 가볍게 발을 내린다. 어느덧 12월의 중순이구나.
역을 빠져나와 길모퉁이를 돌자 금요일 특유의 온기가 퍼지기 시작한다. 달콤하게 번지는 붕어빵 냄새, 기름 위에서 데굴거리는 타코야끼, 어묵 국물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사람들은 슈크림과 팥 사이에서 짧은 행복한 고민을 하고, 한 모금 어묵 국물에 굳은 어깨를 풀어냈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네온사인 아래에서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하루 고생했어.”
누군가는 받은 것이 많아 더 넉넉히 나누고, 누군가는 잃어본 것이 많아 그 잃음의 자리에 남은 온기를 조용히 덤으로 내어준다. 오묘하게도 상처가 깊을수록, 그 상처의 벽면에는 빛이 오래 머문다. 마치 밤새도록 식지 않는 잔불처럼, 희미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온도가 남아 있다. 빛은 저 멀리에서 찾는 것이 아닌가 보다. 우리의 하루 속에 스며든 미세한 떨림들, 말없이 포개놓은 마음의 조각들 속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추는 것 같다.
"어둠이란 빛의 반대가 아니야. 빛이 쉬어가는 자리일 뿐이지. 우리가 숨 고르듯, 세상이 잠시 멈춰 서는 틈일 뿐이야. 그 틈 속에서 오래 눌린 마음이 숨을 돌리고, 희미한 희망의 기척이 작은 먼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른단다."
세상이 가장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조용히 스스로를 태우고 있는 심지가 있다. 그 작은 심지가 때로는 나를, 어떤 날에는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아주 미약한 방식으로 비춘다. 우리는 모두 그런 빛을 품고 태어났다. 무너진 날들 위에서도, 덜 마른 눈물 속에서도, 마음 한가운데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깃들어 있다. 그 빛은 때로는 말 한마디로, 따뜻한 손목의 온도로, 혹은 깊은 침묵 속에서 스며 나오는 숨결로 다른 이에게 옮겨간다. 그리고 그 빛을 건네받은 이 역시, 어느 저녁, 어둠의 골목을 지나며 또 다른 이에게 같은 온기를 흘려보낸다.
받은 만큼 주는 사람도 있지만, 잃은 만큼 더 깊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저마다 받은 것과 잃은 것을 품은 채 자신만의 빛을 만들어내며 걷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 조용한 빛이 될 수 있겠지. 어둠 속에서 불현듯 피어오르는, 아주 작은,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빛의 한 조각이 될 수 있겠지. 사라졌다 믿었던 자리에서조차 다시 피어나는 작은 불씨를 안고.
"누가 더 많이 받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이미 내 안에 있는 걸 볼 수 있다면 말이야. 언제나 빛은 생각지도 못한 시간, 예견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거든. 그리고 그거 알아? 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어. 그건 우리 안에 품고 태어나는 거니까. 세상은 많이 받아본 사람이 더 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많이 빼앗겨 본 사람도 충분히, 아니, 때로는 더 크게 줄 수 있다고 믿어.
우리 모두가 갖고 태어나는 게 있으니까.
그걸 볼 수만 있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