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늘 그렇게 시작된다.
해 질 무렵, 버스정류장 옆 벤치에 앉는다. 손바닥 아래로 스며드는 차가운 나뭇결,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속의 낡은 겨울 냄새. 저 멀리서 번져왔다 흩어지는 발자국 소리마저 어둠과 함께 천천히 가라앉는다. 도시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데, 이 작은 정지선 위에서만 시간은 묵직하게 느려진다.
기다림은 늘 그렇게 시작된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고, 특별한 신호도 없이. 어느 날 마음 한가운데 빈 의자가 조용히 놓이고는 그저 자리를 차지한다. 처음엔 낯설고, 피하고 싶고, 잡을 수 없는 공허함이 손끝을 시리게 한다. 뭘 할 수 있을까 한참을 찾아보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고요와 마주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다림은 이상한 방식으로 묘하게, 나를 천천히 깎고 다듬는다. 바람이 어느 순간 다른 냄새를 품기 시작했는지,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저 섬세한 떨림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낮게 깔린 햇살이 언제부터 내 어깨를 기울여 눌렀는지를 문득 알아차리게 한다.
기다림은 공허일까 고요일까.
폭풍과 잔잔함 사이의 너울일까.
슬픔과 기쁨의 경계에 서 있는 그림자일까.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흙 속의 씨앗은 가장 어두운 시기에 가장 바쁘게 꿈틀거린다.
겨울나무가 침묵으로 봄을 준비하듯, 보이지 않는 시간 아래에서만 자라는 것이 있다.
기다리다 보면 결국 마주하는 건 늘 ‘나 자신’이었다. 일상에 밀려 놓쳐버린 작은 '나'.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토록 서둘러야 한다고 믿었는지, 지금의 흔들림이 왜 내 마음에 찾아왔는지. 그 해답을 고요한 시간이 천천히 수면 위로 밀어 올리기 시작한다.
지금도 어떤 날은 심장이 너무 조용해서 길을 잃은 것 같고, 또 어떤 날은 이유도 없이 벅차올라 무엇이 나를 이끄는지도 모른 채 발을 내딛곤 한다.
기다림의 시간은 대체로 그렇다.
눈앞은 희미하고, 손에 잡히는 건 없고, 하루하루가 얇은 안개처럼 흘러간다.
그럼에도 그 안갯속을 걷는 무모함이 내게 주어진 은총의 근육이 된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방향을 향해 미세하게 떨리던 심장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건 용기라기보다는 조용히 팔랑이는 기도 한 줄기였다. 나는 지금도 그 작은 기도를 품고 길을 나선다.
기다림이 어려운 건 ‘언젠가’라는 말이 품은 시간의 폭이 너무 넓어서다. 언젠가를 향해 걷는 일은 손에 물을 담아 옮길 때처럼 쉽게 새어버린다. 의지와 확신, 설렘마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어떤 날은 무너지고, 어떤 날은 숨이 가쁘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 주저앉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들인 모든 시간이 사라지는 날도 있다.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말했다.
"밑 빠진 독에 어떻게 하면 계속 물을 부을 수 있을까?"
"채우려고 하지 않으면 돼."
기다림은 이런 방식으로 나를 단련했다. 끝을 보기 위해 애쓰기를 멈추는 방식. 정상에 닿기 위해 바쁘게 걷기를 멈추는 방식. 그렇게 고요가 공허를 채우고, 잔잔함이 폭풍을 덮으며, 기쁨이 슬픔의 자리를 조금씩 대신하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나는 그 시절의 나를 꽤 아껴본다. 대책 없는 희망을 품고도 쉽게 포기하지 않던 마음, 뜻대로 되지 않아 울던 밤에도 다음 날이면 다시 일어나 보려 했던 작은 의지. 그때는 몰랐지만, 그 모든 작은 움직임이 지금의 나를 향한 길을 조용히 닦아놓고 있었다.
어떤 목적을 향한 길에도 실패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실패는 조금씩 방향을 틀어준 신호였고, 다시 일어서게 만든 의문의 힘이었다.
당시엔 알지 못했던 의미로 수 놓인 순간들이, 시간이 지나면 손바닥 안의 작은 빛처럼 남는다.
버스가 멀리서 서서히 다가오는 실루엣이 보인다. 그 순간, 방금 전까지의 정적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림이 남긴 온기를 등에 얹은 채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자라는 것들이 있다.
안갯속을 걷다 보면 결국 닿게 되는 세상이 있다.
바람이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도, 지금 이 순간 내 뺨을 스치는 결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마음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심장이 두드리는 방향을 향해
보이지 않아도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멈춘 듯 흐르고, 흐르는 듯 멈춘 시간 사이에서
조용히 익어가던 나의 모든 걸음들이 비로소 하나의 길로 이어짐을 이해하게 된다.
안개 속을 걷는다고 해서 길이 없는 건 아니다.
바람의 목적을 모른 채로도 걸을 수 있는 믿음은
이 억겁의 기다림 속에서 단련된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지금 이 길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모르는 사이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안갯속을 걸어도, 결국 닿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