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
어느덧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른 뼈처럼 보일 만큼 가볍고, 어떤 날은 금세라도 부서져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아, 자연도 이렇게 텅 비워지는 계절이 있구나.’
잎을 모두 떨어낸 나무는, 멀리서 보면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공허 속에 숨쉬는 묘한 생기를 만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가지 끝에 아주 작은 숨결 같은 것이, 아주 작은 떨림이 미세하게 깃들어 있다. 마치 살아 있는 것들이 다음 숨을 준비하는 고요한 틈처럼.
그 앙상함을 보며, 올해의 나도 꼭 저 나무와 닮아 있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모든 감정이 벗겨지고, 기력이 떨어지고, 더는 무엇도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비어버린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를 내 안에 숨어있던 단단하고 강한 생명의 숨결을 느낀 순간으로 기억한다.
앙상한 가지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겨울 속에서도, 봄을 준비하고 있는 나무를 본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소박한 두 존재, 나와 이 나무가 눈을 마주친 그 순간. 이 나무는 내 한숨 속에서 아주 미세하고 작지만 따뜻한 온기를 느낀듯 했다.
그때 내 안에 잔잔하고 고요한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마치 작은 아기가 내 손가락을 꼬옥 움켜쥐는듯한, 그 작은 따스함. 심장 한 부분이 미세하게 다시 뛰는 느낌. 피가 온몸에 퍼지며, 숨 한 조각이 어둠 속에서 미약하게 흔들리는 빛처럼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람도 결국 자연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려는듯, 나무는 나와 눈맞춤을 계속했다.
완전히 비어버린 순간에도, 우리는 다시 살아날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잃는 계절은, 동시에 조용히 무언가가 자라나는 계절이 된다.
내 안 깊은 곳, 내가 모르는 사이, 작은 씨앗 하나가 숨을 고른다.
누군가는 잎을 떨군 나무를 보며 앙상함만 떠올리겠지만, 자세히 보면 '견디는 생명'이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얼음 아래서도 뿌리를 조용히 움직이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꾸준함과 단단한 생명.
그 계절을 우리도 통과하고 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쉬었던 단 하나의 깊은 한숨이 나를 살렸다. 그 한숨이 나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냈고, 내 안의 생명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지금의 우리는 비워진 가지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는 이미 다음 계절이 조용히 움트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은 지금도 아주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가 잎을 모두 떨어뜨리는 건 실패가 아니라, 겨울을 나기 위한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걸 나는 뒤늦게 배운다.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진짜 견딜 힘을 모을 수 있다고. 버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살아나기 위해 비워두는 것이라고. 나는 그런 자연의 조용한 방식을 올해 처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내 어깨에서 하나씩 떨어져 나가던 기대들. 손에서 스르륵 흘러내렸던 열심들. 끝내 붙잡지 못했던 관계와 말들.
그 모든 것이 앙상함만 남긴 줄 알았는데, 그 앙상함이 오히려 다시 숨을 들이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나무가 잎을 잃어야만 다음 계절의 생명을 품을 수 있듯, 우리 역시 무언가를 잃는 동안, 또 다른 무언가를 품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가지 끝은 아직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말라가는 끝자락 안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연둣빛이 아주 천천히, 오래도록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겨울의 혹독함을 통과하는 건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살아 있으려는 몸의 방식이다.
숨을 쉬기 위해 몸이 조금 더 움츠러드는 것처럼,
더 크게 피어나기 위해 나무가 잠시 앙상해지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잠시 앙상해진 채 올해를 건너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 공허가, 그 연약함이 두렵지 않다. 비어 있음은 결핍이 아니라, 곧 채워질 선물이므로.
언젠가 바람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날, 저 가지 끝에 아주 작은 초록이 돋아날 것이므로.
처음엔 미세해 알아채기 어려워도, 그 초록은 어느새 나무의 모든 날을 뒤흔들 만큼 강한 생명이 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리고 나도 그때쯤, 내 안의 조용한 움트림을 발견하게 되겠지.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히 자라나는 나의 계절을.
앙상해지는 건 끝이 아닌,
생명을 품기 위한 가장 조용한 시작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앙상함 끝에서 우리는 다시 피어날 것이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 이사야 11,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