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 허구의 독립, 그리고 진정한 스스로 서기

pseudo independence, 마음 속 찡찡이

by 메리힐데

허위의, 가짜의 라는 뜻의 Pseudo와 independence의 합성어, Pseudo independence. 허구의 독립.


의젓해 보이고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주요 애착 대상자에게 결핍된 의존의 욕구를 끊임없이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한다.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성장기에 정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존의 욕구가 주요 양육자로부터 채워지지 않아 그 결핍이 겉모습은 의젓한 마음속 찡찡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이 성인으로 성장한 후 독립을 요구하기도 하고 요구받기도 한다. 성인이 된 이후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을 이루는 것은 모든 이들의 인생의 과업이기에 그 반대가 되는, 혹은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의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무책임해 보이고, 자기 할 일도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의존적이다'라는 말 안에는 부정적인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꽤나 그렇게 느낀다. 가끔은 타인과의 대화에서 그런 쌀쌀함을 느끼기도 한다. '결국 네가 해야 하는 몫이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은.


여유롭게 독립적인 것과 기를 쓰고 독립적인 것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자발적 독립과 강요된 독립의 차이라고 말하면 조금 더 설명이 될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독립의 모습은 이렇다. '독립'이라고 하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독립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다 성장한 성인이 필요한 것을 챙겨서 떠나려고 현관 앞에 서있고, 엄마와 아빠는 서로 너무나 뿌듯한 표정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아이를 응원하며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독립의 모습이 아닐까.


이에 반해 '허구의 독립'은 거절에서부터 만들어진 독립성이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아이이기에 주어지는 그 양육의 기간 내내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의존의 욕구를 거절당했기에 감정적으로 무시당한 것에 대한 반응이다. 아무에게도 의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름 세워낸 대책이 바로 허구의 독립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의존적이지 않은 아이였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혼자 해결하려하는, 그리고 누군가에게 '혼자서도 의젓하게 참 잘하는 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을 칭찬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내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서 가끔은 우월감을 지녔다. '쟤네는 저것도 혼자 못하나? 왜 엄마 아빠가 오지? 왜 엄마 아빠한테 부탁을 하지? 난 혼자 할 수 있는데. 난 잘 크고 있어.' 그런데 마음 속에서 깊은 부러움이 있었다. 어린 나는 혼자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청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가르쳐주는 부모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우리 엄마는 언제나 나의 해결사였다. 내가 과제를 까먹고 안 가져온 날에는 엄마가 가져다줬고, 요리도 해다가 도시락을 배달해주셨고, 언제나 내가 부르면 거의 대부분 오셨다. 그런데 나는 일상에 스며든 보호자를 원했던 것 같다. 이벤트 같은 엄마가 아니라.. 일상의 아주 소소한 것을 나누는 동반자, 그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나의 가족을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하교 후 집에가면 간식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엄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니면 하굣길에 엄마나 아빠가 서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뭐 어쨋든, 나는 의존적이지 않은 아이로 자라왔다. 나는 어딜가든 의젓하고,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스스로 해결하는 아이였기에 도움을 구하는 것도 익숙치 않았고 그것은 나에게 곧 '약함', '미성숙',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생존에 있어 공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관계 안에서 보였던 나의 과도한 징징거림과 투정은 스스로 생각했던 '나'의 모습과 달랐다. 다행히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도움을 청하고 싶은 나의 어릴적 그 감정을 인정하고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럴 때면 어린 나를 달래주려고 노력하거나 다그치고는 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난 다 컸다고. 상대방을 힘들게 하지 말라고.


타인에게 기대는 것을 나는 '상대를 힘들게하는 행동'으로 여긴다. 그럼 과연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댈 때 나는 힘들까? 그렇지 않다. 물론 내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면 힘들기야 하지만, 그럴 때는 '아, 너가 힘들구나. 정말 들어주고 싶은데 오늘 내가 너무 피곤해서 그게 안될 것 같아. 미안해.'라고 이야기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내가 그정도로 힘들 때에는 주로 타인의 전화 연락을 받지 않는다. 전화가 왔을 때 힘들다고 호소하는 이의 말을 중간에 끊는 것이 나에겐 불가능이기에 처음부터 거절하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삶이라는게 가능할까. 가능할 수 있다, 아니 사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럼 굳이 가족을 만들고 타인과 함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가 괜찮다면 함께할 필요가 없지 않나?


이때 나는 독립과 격리를 혼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독립이 격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 함께하고 싶다면 이전에 '독립'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 분리된 상태인 개인이 존재함을 바탕으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독립은 어쩌면 긍정적인 퇴행으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의존의 욕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는 심리상태다. 어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니까.


어느 정도의 건강한 의존의 욕구는 사랑받게 하고 사랑하게 한다. 어릴 때부터 나의 보호자에게 정서적으로 의존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느꼈던 나는 의존할 수 있는 상대, 의존해도 되는 상대를 만났을 때 어느 정도의 의존이 건강한 의존인가에 대한 경험의 임상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지는 타인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 '눈치'를 살피는 나만의 방어막을 세운 배경이 되었다. 상대가 힘들지 않는 건강한 선을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그것이 서로를 위한 건강한 방어막인 줄 알았는데, 학창시절부터 사회생활을 경험하면서 나의 방어기제가 일정한 선을 넘어 '진짜 나의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큰 장애가 되고 있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 관계에 '나'는 없었으니까. 상대의 눈치만 살피고 기분을 살피던 순간들이 모여 어느새 나는 타인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를 쓰고 있는 독립성은 사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다리처럼 위태롭고, 때론 상대를 서운하게 한다. 받아야 채워지는 거절감을 내 스스로 채울 수는 없는 것이니까.


충분히 건강하고 따뜻한 관계 안에서 채워지는 의존의 욕구는 지나간 결핍의 시간들을 채워주고, 채워진 결핍으로 또다시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곧 사랑이고, 우리가 좀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억하자.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것처럼, 저 사람도 사랑하는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 진정한 자립이란 무엇일까. 자립은 격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자립'에 이르기 위해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과 도움이 필요한 일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 할 일은 스스로 하고, 도움이 필요한 일은 기꺼이 도움을 청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립, 즉 내 인생을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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