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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Nov 08. 2018

프리랜서에게도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기술도 없는 사무직 퇴사자의 프리랜서 도전기


최종화에서 구체적인 금액과 함께 더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지만, 사실 프리랜서 출판 번역가가 받는 단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기준이 뭐냐고? 번역으로 빌딩을 세웠다는 사람은 (정말 아쉽게도) 본 적이 없지만, 이 일만으로도 자기 한 몸 건사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라면 우선은 어느 정도 대답이 될 것 같다. 사실 부당하게 비용을 깎으려고 드는 악덕 클라이언트와 잘못 엮이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프리랜서의 외주 단가는 업계를 막론하고 대개 먹고 살만한 선에서 형성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분야라면 애초에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단가 이야기지 수입 이야기가 아니다. 쉽게 말해서, 건당 단가가 아무리 높은 업계라도 일감을 지속적으로 받지 못한다면 그 일만으로 먹고 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감 하나당 프리랜서에게 떨어지는 외주비가 300만 원이라고 치자. 얼핏 들었을 때는 꽤 괜찮은 금액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달에(최소한 두 달에) 한 건 이상 끊김 없이 일감을 받을 수 있을 때 이야기이다. 휴직이나 휴업에 대한 금전적 대한 보상이 없는 프리랜서의 특성상, 단가가 아무리 높은 작업을 하더라도 몇 달, 몇 년짜리 공백이 밥 먹듯이 생긴다면 평균 소득은 형편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작가든, 배우든, 프로그래머든, 웹 디자이너든 프리랜서라면 누구도 이 법칙의 예외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단행본을 넘긴 후 내게 닥친 상황이었다. 오랜 노력과 기다림 끝에 내 이름으로 된 번역서를 따냈고, ‘나쁘지 않은’ 원고료 또한 떼이는 일 없이 무사히 입금 받았다.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안정적인 프리랜서 생활이 아니라 또 다른 백수기였다.


첫 일주일은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밀린 문화생활도 해가며 마음 편히 휴식을 취했다. 그 다음 일주일은 조금 초조하면서도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쉬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본격적으로 엄습해온 것은 여전히 백수인 채로 맞이한 그 다음 월요일이었다.


일감이 충분할 때는 누구보다 큰 자유와 보람을 느끼지만, 일이 없어지면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기분으로 하루하루 버텨야 하는 것이 프리랜서의 아이러니한 팔자이다. 버티는 놈이 살아남고, 기다리면 언젠가 일감이 들어온다지만, 솔직히 간이 웬만큼 큰 사람이 아니고서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언젠가’를 마냥 속 편히 기다릴 수는 없을 것이다. 간이 크기는커녕 산들바람에도 사정없이 흔들리는 심약한 정신력을 지닌 나는, 정말 한 달 내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리지 않는 휴대폰과 텅 빈 메일함을 부질없이 확인하며 보냈다.


그 쪽지가 날아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온갖 상념과 고민이 아슬아슬한 높이까지 쌓여가고, 그 사이 안절부절못하며 짝짝 찢어댄 휴지 조각이 열 무더기쯤 되어가던 바로 그 때.




쪽지를 보낸 곳은 1년여 전에 가입했던, 1인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모인 모 포털사이트의 카페였다. 한창 번역 공부를 하던 그 시절의 나는 출판인들의 근처에서 기웃거리다보면 작은 공역 일감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이런 저런 카페며 사이트에 가입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 몇 번 들어가 본 뒤로는 오프라인 세상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느라 점차 접속 횟수가 뜸해졌고, 어느덧 그 카페의 존재는 다른 여러 사이트와 함께 내 뇌리에서 까맣게 잊히고 말았다.


그곳에서 약 1년 만에 보내온 쪽지의 내용은, 사실 특별할 게 없는 전체 공지에 불과했다. 하릴없이 한 달째 백수 생활을 이어가던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것은 쪽지의 내용이 아니라, 그 쪽지로 인해 불현듯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 1인 출판의 존재였다. ‘발신자’란에 찍힌 카페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내 절박한 머릿속에서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뒤섞인 생각 무더기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1인출판사? 1인출판사라면 혼자 운영하는 출판사잖아. 그럼 나도 차릴 수 있는 거 아냐? 잠깐만, 왜 지금껏 누군가 책을 맡겨주기만 기다리고 직접 만들어볼 생각을 한 번도 못했지출판사 등록을 하고 내가 번역한 책을 내 손으로 팔면 되잖아!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내가 그 카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문제의 쪽지를 받기 1년도 더 전이었다. 정작 가입할 당시에는 초짜 번역가로서 일감을 받아보려는 목적뿐이었던 내가, 어떻게 별 내용도 없는 쪽지 한통에 직접 1인출판사를 차려보자는 말도 안 되게 진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당시에는 매일이 너무 초조하고 불안해서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러한 심경 변화의 배경에는 단순한 백수의 절박함뿐 아니라 그 사이에 얻은 여러 가지 경험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여의 기간 동안 나는 한 권이나마 내 이름으로 된 번역서를 냈고, 블로그와 웹툰을 통해 직접 쓴 글과 그림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작은 법률사무소의 개업을 도우며 사업자 등록 과정을 어깨너머로 배웠고, 출판계 언저리를 맴돌며 출간 프로세스나 저작권 관련 풍월(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에 저작권이 없는 무료 작품이 꽤 많다는 유용한 정보)도 조금씩 주워들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얻은 지식과 경험들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우연한 기회에 ‘1인 출판’이라는 키워드가 입력된 순간 ‘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근거가 조금 있는 자신감으로 출력된 것이다. 그야말로 ‘가치 없는 경험은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뜻밖의 결심은 백수의 초조함을 추진력 삼아 즉시 행동으로 옮겨졌다. 나는 당장 그날 부로 출판사 설립 과정을 알아보고 첫 책 출간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설립’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막상 체험해보니 1인출판사를 세우는 과정은 김이 빠질 정도로 간단했다. 마음에 드는 출판사 이름을 정한 뒤 주민등록증 하나 들고 구청과 세무서에 방문하여 신고를 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이렇게 덜컥 ‘메리북스’라는 출판사를 세운 나는 본격적으로 책 만들기에 들어갔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감안하여 인쇄비와 유통비 등의 목돈이 필요한 종이책 대신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는 전자책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저작권이 없는 무료 작품 중에서 재미와 대중성, 분량 등을 이리저리 따진 끝에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첫 책으로 선택했다. 


직접 번역을 하고 표지를 그려가며 원고를 완성한 후에는 교X문고, 리X북스 등의 대형 인터넷서점과 계약도 체결했다. 그렇게 공부와 신고와 계약과 제작에 한 달가량을 온전히 쏟아 부은 끝에, 가내수공업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진 메리북스의 첫 전자책은 990원이라는 가격이 붙어 실제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 가격이 특별히 싼 것은 아니고, 무료 저작권 원고로 만든 전자책에는 대개 1,000원 안팎의 저렴한 가격이 붙는다)




사실 내가 전자책 판매를 통해 얻은 금전적 수익은 얼마 되지 않는다. 조금만 계산기를 두드려도 금방 분명해지겠지만, 권당 990원짜리 책 한 권을 팔아서 이익이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는가. 현재까지 우리 출판사의 유일한 책인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기록하는 월 평균 매출은 자장면 한 그릇은 사먹을 수 있지만 군만두 추가까지는 빠듯한 8,000원~10,000원 선이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면 1년도 더 전에 등록한 전자책 덕분에 매달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는 것보다는 쏠쏠한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수익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메리북스 설립과 전자책 제작에 집중력을 쏟은 덕분에 나는 끝없이 우울할 수도 있는 두 번째 백수기를 나름대로 바쁘고 희망차게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일이 끊겼을 때 언제든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생겼다는 사실은 늘상 공백기의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프리랜서의 정신건강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그 시기 이후로 아직까지 세 번째 공백기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북스의 존재는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심신 안정제 역할(그리고 매달 간자장 한 그릇을 사주는 소소한 산타할아버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다음 프리랜서 일감이 들어온 것은 한창 두 번째 전자책 원고를 제작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기다리니 일이 오긴 오는구나. 일단은 새로 들어온 일감에 집중하고, 이 일이 끝나면 전자책 작업을 마저 마무리하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약 두 달의 공백 끝에 들어온 그 일감이 눈코 뜰 새 없는 성수기의 시작점이었다는 사실을, 그 때의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작가 인스타그램: @seo_merry

작가 유튜브: 서메리Merry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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