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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Oct 25. 2018

생계를 위해 잠시 회사로 돌아가다

기술도 없는 사무직 퇴사자의 프리랜서 도전기


퇴사 2년차, 나는 일주일에 이틀씩 삼성동의 법률사무소로 출퇴근하는 파트타임 직장인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프리랜서와 백수가 절반씩 섞여 있던 애매한 내 신분이 1/3 프리랜서, 1/3 백수, 1/3 회사원이라는 한층 더 알쏭달쏭한 상태로 진화한 것이다.


새로 일하게 된 회사는 변호사 2명에 사무장 1명, 그리고 일주일의 절반만 출근하는 파트타임 직원인 나까지 총 3.5명으로 구성된 아주 작은 법률사무소였다. 9호선 지옥철에 끼어 전철 18정거장 거리의 새 회사로 향하던 첫 출근 날, 나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는 바람에 괜히 처지만 더 궁색해진 것 아니냐는 마음의 절규를 애써 모른척해야 했다. 프리랜서에 도전한다는 꿈과 함께 퇴사를 선택했고, 그 이후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나 불과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번듯한 대형 로펌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던 내가 개인 법률사무소에서 파트타이머로 일하게 되었다는 짜디 짠 현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줄어든 근무시간을 감안한다 해도 새 직장의 급여는 이전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회사 생활의 큰 보람 중 하나였던 자기 계발비나 사내 도서관, 직원 식당 같은 복지는 애초에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게다가 같은 법률사무소라도 전통 있는 대형 조직과 이제 막 시작한 소규모 조직의 업무 범위는 정말이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퇴사 전에 기획팀 소속으로 일했던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말 그대로 ‘기획’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내 담당이 아닌 일들은 해당 팀에게 전화로 요청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변호사를 제외한 소속 직원이 고작 1.5명에 불과한 이 회사에서는 업무 분장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손님 안내나 소송 서류 제출 같은 평범한 사무직원의 일은 물론이고 번역, 리서치, 사업자 등록, 명함 제작, PPT 작성, 주차권 관리까지 전부 내 업무에 포함되었고, 심지어 동네방네 유명한 기계치인 내게 (오직 사무실에서 제일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사 홈페이지 제작과 서버 관리라는 말도 안 되는 미션이 떨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조그마한 회사에는 충분한 장점이 있었다. 규모 자체가 작은데다 구성원 전원이 대형 조직에 염증을 느끼고 나온 사람들인 만큼(김변호사님, 서변호사님, 고실장님, 혹시 저만 그런 거였다면 오해 죄송합니다) 상대적으로 수평적이고 유연한 분위기였고, 이제 막 출발하는 회사 특유의 ‘우리 힘을 모아 잘 해보자!’는 단합심도 충만했다.


무엇보다 나는 예기치 않게 한 배를 타게 된 이 새로운 인연들이 금방 좋아졌다. 이 역시 조직이 작은 덕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파트타임 사원의 의견이 대표 변호사에게까지 신속히 전달되는 회사 문화도 마음에 들었고, 대중없이 쏟아지는 업무 앞에서 당황하는 내게 짜증 한 번 없이 일을 가르쳐주는 베테랑 사무장님도 존경스러웠다. (엄마뻘인 사무장님은 이따금씩 ‘메리씨는 아직 젊으니까 언젠가 지금 배운 것들을 가지고 자기 사업에 도전해 봐요.’라고 귀띔해주곤 했다. 뒷부분에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던 이 조언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실현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몇 개월은 내 프리랜서 인생에 아주 잠깐 찾아온 유토피아였는지도 모르겠다. 나쁘게만 보자면 회사원으로도 프리랜서로도 자리를 잡지 못한 애매한 시기였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적으나마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며 일주일에 최소 절반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나날이었으니까. 게다가 사람 스트레스에 짓눌려 이전 회사에서 뛰쳐나온 나로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잘 맞는다는 (정말이지 현실의 회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어쩌면 프리랜서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환경을 원하지 않을까? 절반의 불안한 자유와 절반의 안정된 구속이 양립하는 그런 비현실적 환경을. 만약 쭉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그 회사에 남아 있기를 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막을 수 없는 변화라는 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두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연인과의 이별처럼 이 회사와의 안타까운 끝을 예감하게 되었다. 그다지 예리하지도 않은 내 직감을 건드린 것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두 가지 상황 변화였다.




첫 번째 변화는 사무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시작된 공격적 규모 확장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품고 안정된 로펌 자리를 박차고 나온 변호사들이 ‘언제까지나 우리 넷이서 오순도순 일했으면 좋겠다’는 내 나약한 바람에 따라 초미니 사이즈 법률사무소에 안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적극적인 영업 덕분에 고객들은 순조롭게 늘어났고, 얼마 안 가 신입 변호사며 로스쿨 인턴들까지 채용되었다. 초반에는 사무장 1명에 파트타이머 0.5명으로 어찌어찌 돌아가던 사무실 업무에 차질이 생긴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일주일에 이틀이 아니라 5일 내내 출근하라는 압박이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사무장님의 건강이 조금 악화되었는데, 내가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병가를 낼 수가 없으니 병원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 죄송한 상황도 자주 연출되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에서 혼자 제 몫을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은 자연스레 ‘이 조직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변화는 드디어 내게도 제대로 된 프리랜서 일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2016년 어느 늦가을 날, 첫 공역 의뢰가 들어왔다. 다섯 명이 나눠서 진행하는 경제 전망서 번역 건이었는데, 비록 혼자서 온전한 책 한 권을 맡은 것은 아니라도 일한 만큼 원고료가 정산되는 진짜 ‘일감’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출판사와 에이전시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선택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나는 지금까지 성실함과 원만함을 열심히 어필해온 노력이 드디어 보상을 받은 거라는 확신 섞인 느낌을 받았다. 내가 받은 첫 일감은 연말이라는 짧은 출간 시기를 절대 놓칠 수 없는 내년도 경제 전망서였다. 두세 명도 아니고 다섯 명에게 나눠서 번역을 시키는 것만 보아도 이 일의 시급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마감 기한을 반드시 지킨다는 신용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원만함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을 맡길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추론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클라이언트가 선택한 5명의 프리랜서 목록에는 분명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작업을 기점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크고 작은 일감들은 대부분 출간 날짜 혹은 제출 기한이 엄격하게 정해진 잡지나 서류의 공역 건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완벽한 예술가’보다 ‘원만한 성실맨’이 필요한 일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직장인과 프리랜서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던 내게, 드디어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3일 동안 어찌어찌 처리 가능했던 공역 작업과 달리, 최소 두 달을 온전히 투자해야 하는 첫 단행본 번역 일감(그렇다. 책 표지에 내 이름이 옮긴이로 인쇄되는 바로 그 일감!)이 들어온 것이다. 사무소 분들과의 몇 차례에 걸친 상담 끝에, 나는 후임 직원을 뽑아 자리를 넘기고 두 번째이자 아마도 마지막이 될 직장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1/3 프리랜서, 1/3 백수, 1/3 직장인은 그렇게 생전 처음 풀타임 프리랜서의 일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작가 인스타그램: @seo_merry

작가 유튜브: 서메리Merry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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