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도 없는 사무직 퇴사자의 프리랜서 도전기
얻어 걸린 웹툰 연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반면 진지하게 도전 중인 번역가로서의 전망은 여전히 깜깜하던 2016년 가을께, 몇 주 간격으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시간 순서대로 얘기하자면 난데없이 어떤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첫 번역서 계약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렸고, 그로부터 얼마 후 또 다른 회사에서 입사 제안을 받은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번역가 이력서를 넣어놓고 밤낮으로 문을 두드리던 모 출판번역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왔다. 정식 번역서를 받은 적은 없지만 자잘한 아르바이트성 일감으로 몇 번 거래한 적 있는 곳이었기에 전화 자체는 특별히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휴대폰 화면에 뜬 것은 담당 실무자가 아니라 지금껏 단 한 번도 통화해 본 적 없는, 명함을 받고 그저 형식적으로 입력해두었던 에이전시 대표의 연락처였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누른 내가 횡설수설 안부 인사를 늘어놓는 사이, 대표는 침착한 목소리로 직접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으니 가능한 때에 사무실로 한번 방문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 입에서 ‘아무 때나 가능하다’는 다급한 대답이 튀어나오기까지는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별 거 아닌 일이라면 전화나 이메일로 처리해도 될 텐데 굳이 부르기까지 하는 걸 보면(그것도 대표가 직접!) 분명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우리 사이에 나눌 ‘중요한 얘기’는 일감 계약에 관련된 것밖에 없었다.
나는 당장 그날 오후로 잡은 약속시간에 맞춰 상수동에 위치한 사무실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너무 오버하지 않은 듯 깔끔한 인상을 주기 위해 칼 정장과 캐주얼의 중간쯤에 있는 블라우스와 무릎길이 스커트를 차려입고, 혹시 얘기가 급진전될 때를 대비해 계약용 도장까지 챙긴 상태였다.
하지만 터질 듯 부푼 기대가 무색하게도, 대표가 건넨 제안은 번역이 아니라 ‘에이전시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뜻밖의 입사 제의였다. 그는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직원 하나가 개인 사정으로 퇴사를 하게 되었고, 후임을 물색하던 중 그간에 보인 내 원만한 태도와 로펌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는 프로필 경력을 보고 연락을 하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실망스러웠고, 그 다음으로는 혼란스러웠다. 물론 일자리 제안 자체는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번역 에이전시 대표가 번역가 지망생에게 전혀 다른 직업을 권하는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내 태도와 경력을 높이 쳐준 것뿐일까? 혹시 내게 번역가로서의 전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예상치 못한 제안에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대답과 함께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고민이 안 된 건 아니었다. 공부한 기간 1년을 빼더라도 번역서 한 권 없는 ‘프리랜서 번역가 지망생’ 기간은 이미 몇 개월째 기약 없이 지속되고 있었고, 앞으로도 몇 달, 아니 몇 년 안에 기회가 찾아오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일단 대표가 제시한 근무 조건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며칠간의 내적 갈등 끝에 이 제안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장까지 때려 치고 나온 마당에 제대로 된 프리랜서의 맛도 못 본채 다시 회사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컸지만, 무엇보다 다른 직장도 아니고 ‘번역 회사’의 직원이 되는 것은 도저히 현명한 선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면 당연히 프리랜서로 일하는 수많은 번역가들과 마주하게 될 테고, 그 때마다 부러움과 후회를 느끼지 않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호의에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전달했다. 소심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답게, 혹시 대표의 제안을 거절한 일로 미운 털이 박혀 이 회사에서는 영영 일감을 못 받는 게 아닐까 벌벌 떨면서.
하지만 내 걱정은 (대개의 경우 그렇듯) 기우로 밝혀졌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그 에이전시에서 내 인생 첫 번역서 계약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동안 출판사와 에이전시의 눈에 조금이라도 띌까 싶어 이력서를 고치고 또 고쳐 제출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요리나 핸드메이드 소품 만들기 같은 자잘한 취미부터 운영 중인 블로그까지 나를 알릴 수 있는 정보는 깨알 같이 전부 기재했고, 어설프게 웹툰 연재에 참여하면서부터는 경력 란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이라는 문구도 슬쩍 추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에이전시에서 요리와 일러스트에 익숙하다고 적힌 내 이력을 감안하여 새로 들어온 일러스트 요리책의 번역가 후보로 나를 추천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식 번역서 하나 없는 내게 수백 만 원짜리 일감이 덜컥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얻은 것은 정확히 말해서 기성 번역가 몇 명과 같은 내용의 샘플 번역문을 제출하고 출판사의 선택을 기다리는 일명 ‘경쟁 샘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었다. 샘플의 길이는 A4용지로 2페이지, 준비에 주어진 시간은 3일이었다(경쟁자가 몇 명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대충 눈치를 보니 나를 포함해 3명 정도가 참여하는 것 같았다).
함께 참여한 다른 번역가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1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해서 겨우 얻어낸 첫 기회였다. 보통 영-한 번역 2페이지는 검토와 수정을 포함해도 대략 4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지만, 나는 주어진 3일을 꼬박 투자하여 내 능력 안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샘플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사이에 원문과 번역문을 번갈아가며 못해도 100번씩은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약 일주일 만에 나온 결과는 일말의 여지도 없는 시원한 탈락이었다. 현실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부족한 실력과 모자란 경력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솔직히 이 시점에는 내게 프리랜서로 일할 깜냥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도저히 떨치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1, 2주쯤 지났을까? 평소처럼 번역 공부와 자잘한 아르바이트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던 내게 또다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 연락을 준 사람은 예전에 로펌에서 함께 일했던 한 변호사였다. 아마도 잘못 걸었으리라는 생각(서마리 변호사한테 걸려다가 내 이름을 눌렀겠지)과 의아하다는 생각(그건 그렇고 요즘 희한한 데서 전화가 자주 오네)을 동시에 하며 누른 통화 버튼 너머에서, 나는 두 번째 뜻밖의 입사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가 같은 로펌에서 일하던 다른 변호사 한 명과 독립하여 사무소를 차렸다며, 사무직원으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처음에는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기왕 직원을 뽑을 거라면 같이 일해 봤던 사람이 편하리라는 그의 마음은 충분히 짐작되었지만, 로펌이 싫어서 뛰쳐나온 사람이 또 로펌으로 들어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마음이 흔들렸다. 어렵게 얻은 샘플 기회를 날려먹은 뒤, 내 마음속에는 프리랜서로 먹고 살 자질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지난 번 번역회사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5년을 애면글면 모았건만 허무하게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 잔고도 신경 쓰였다. 게다가 갈팡질팡하는 내 태도를 눈치 챈 변호사는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을 구워 삶아본 현직 법조인답게) 딱 좋은 타이밍에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조건을 쓱 내밀었다. 어차피 이제 시작하는 회사이고 베테랑 사무장은 따로 채용할 예정이니, 일단은 일주일에 20시간만 근무하는 파트타임 직원으로 일해도 된다는 옵션을 제시한 것이다. 근로 시간을 반토막내는 대가로 그가 제안한 급여는 예전에 다니던 대형 로펌의 반의 반 수준이었지만, 내게는 당장 돈보다 프리랜서에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이 훨씬 중요했다.
결국 나는 현실에 굴복했다. 어차피 가진 돈이 떨어지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버틸 참이었고, 퇴사한지 한참이 되도록 아무도 나를 찾지 않다가 몇 주 새 두 번이나 뜬금없이 입사 제의를 받은 걸 보면 이 상황 자체가 일종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그래. 이건 자기 합리화가 아니야. 신의 계시인 거라고). 회사를 뛰쳐나온 지 1년 반. 나는 그렇게 절반이나마 다시 직장인 신분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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