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도 없는 사무직 퇴사자의 프리랜서 도전기
‘어쩌면 난 회사 체질이 아닐지도 몰라.’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친 순간부터 내 인생은 그 전까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회사가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던 시절, 나는 조직 생활에서 불행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 네가 무슨 재벌 2세야? 큰 회사에도 작은 회사에도 적응하지 못하면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남들은 회사 욕을 하면서도 적당히 받아들이면서 사는데, 넌 그들보다 뭐가 더 힘들다고 허구한 날 징징이야? 과음한 날을 제외하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거의 매일 같이 이런 식의 자기혐오를 하며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체질’이라는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자 내가 그토록 불행했던 이유들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호히 말하건대, 체질은 잘못이 아니다.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 사람에게 너는 어째서 복숭아를 만지면 두드러기가 나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만약 그가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숭아 과수원에서 일해야 한다면 당연히 남들보다 훨씬 힘이 들고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그의 잘못이 아니며, 성격이나 능력이나 인내심의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개인의 체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복숭아 과수원에서 일하는 방법밖에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막판에 와서 이렇게 구구절절한 비유를 하는 까닭은 이 장의 제목이기도 한, 프리랜서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때 가장 많이 듣는 세 가지 질문 중 첫 번째에 대답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의 삶이 행복하냐고?
나는 행복하다.
직장 생활과 프리랜서 생활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얘기하자면, 프리랜서가 직장인보다 무조건 더 편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감귤 과수원이 복숭아 과수원보다 딱히 덜 힘들 이유가 없듯이. 일이 적으면 적은 대로 불안하고, 많으면 많은 대로 고달픈 것이 프리랜서의 인생이다. 여름휴가는 물론이고 연차나 병가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이유를 막론하고 단 하루라도 일을 쉬면 그 동안의 수입은 그대로 날아가며, 결과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100% 내 책임이 된다. 회사에 다닐 때는 밤 10시까지만 야근을 해도 짜증과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는데, 지금은 마감을 지키기 위해 해가 뜰 때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단점을 포함해서, 나는 지금 회사에 다닐 때보다 몇 배는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행복은 대단한 보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 빠진 청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가벼운 에코백을 든 채 외출할 때면 답답한 정장 치마와 무거운 가죽백과 꼭 끼는 하이힐에 짓눌려 허덕이던 내 몸이 고맙다고 얘기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집을 나서서 동네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평일 오전에 먹는 모닝세트가 얼마나 각별한 맛인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인 “얼마나 벌어요??”에 대한 대답은, “프리랜서를 준비하던 동안에는 수입이랄 게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직장에 다닐 때만큼 법니다”이다.
사실 프리랜서의 수입을 계산하는 방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인 ‘영한 출판번역’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작업의 난이도나 기한의 시급성에 따라 200자 원고지 1매 당 3,500원~4,000원 사이의 단가를 책정 받는다(원고지 기준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서, A4용지 1페이지는 대략 원고지 8~9매 정도라고 보면 된다. 이 단가는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며, 경력이 길고 인지도가 높은 번역가들은 더 높은 금액을 받을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는 본인이 일감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따올 수 있느냐, 작업을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할 수 있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나 같은 경우는 중간 난이도의 책을 기준으로 A4용지 1페이지를 번역하는데 평균 1시간 정도가 걸리며, 일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에이전시를 끼고 일하기 때문에 최종 번역료에서 15%의 수수료를 떼고 지급받는다. 작업 속도는 나보다 빠른 사람도 느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에이전시와의 계약 여부나 공제하는 수수료 비중 또한 번역가마다 다를 것이다. 특히 에이전시의 경우, 나는 영업이나 회계 처리 같은 부분에 재능이 없는 편이라 수수료를 떼더라도 에이전시에서 일을 받는 게 마음 편하지만, 자신이 직접 영업으로 일을 받아오고 수수료 부분까지 챙기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어떤 분야든 프리랜서의 수입은 대개 이런 식으로 정해진다. 자기 일에 해당하는 단가가 정해져 있고, 나머지는 본인이 일감을 얼마나 잘 따올 수 있느냐, 작업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느냐, 그 일에서 파생되는 부수입을 얼마나 잡을 수 있느냐(출판 번역가가 외주 서류번역까지 영역을 넓힌다든지, 웹 디자이너가 일러스트 실력을 무기로 삽화 작업을 한다든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인 “불안하지 않나요?”에 대한 답은 이렇다. “10개월 뒤는 불안하지만, 10년 뒤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이 대답은 어떻게 보면 직장에 다니던 때와 정 반대라고 볼 수 있다. 회사원 시절, 운 좋게도 규모가 꽤 있는 조직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던 나는 당장 몇 개월 뒤의 생계를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10년, 혹은 그 이후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언제나 목구멍에 걸린 작은 생선 가시처럼 침을 잘못 삼킬 때마다 따끔한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당장 몇 달 안에 잘릴 일이야 없겠지만, 조직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인재도 아닌 내가 정년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이 아주 좋아서 정년까지 버텨낸다 쳐도, 그 이후로 남은 30~40년의 생계를 생각하면 다시금 묵직한 압박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프리랜서의 계약은 길어야 몇 개월 단위로 진행되기 때문에, 단기적인 고용 안정성 측면에서 보면 그 어떤 계약직보다도 불안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아직 다음 일감을 얻지 못한 상태라면, 손바닥에서 수시로 땀이 나고, 동공이 자주 초점을 잃으며, 창밖을 지나는 오토바이 소리부터 전기밥솥에서 배출되는 증기 소리까지 주파수 1000Hz 전후의 모든 소음을 휴대폰 진동으로 착각하는 극도의 초조함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10년, 20년 후의 생계를 생각하면 딱히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애초에 정년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경력이 쌓일수록 안정감이 생기며, 오히려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방향으로 끝없이 변주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리랜서이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나는 번역과 일러스트라는 특기를 살려 1인 독립출판사를 차리는 경험을 했다. 요즘은 영상 편집 기술을 배워서 유튜브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 역시 아직은 다룰 줄 모르지만, 모션그래픽 프로그램을 공부해서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접목시키는 작업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프리랜서가 아니라 프리랜서 할아버지라도 수십 년 후의 생계를 마음 편히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내겐 적어도 프랜차이즈 치킨집보다 훨씬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통해 전한 이야기와 분량 관계상 채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모두 합치면, 내가 프리랜서가 된 과정은 그야말로 기약 없는 좌절과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길고 긴 버팀의 끝에 나는 다행히도 회사 밖에서 먹고 사는 일상을 손에 넣었고, 직장인 시절 매일같이 느끼던 숨 막히는 답답함 대신 그럭저럭 소소한 자유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삶은 회사원에 비해 훨씬 덜 안정적이고 보장되는 혜택도 눈에 띄게 적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보장되는 것도 없고 딱히 안정적이지도 못한 삶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내가 정말로 회사 체질이 아니었다는 일종의 근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직접 몸으로 부딪쳐 찾아낸 근거를 바탕으로, 나는 복숭아 알러지를 가진 채 복숭아 과수원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불행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무작정 뛰쳐나오라는 얘기가 아니다. 회사만 때려치우고 나오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그 다양한 길들을 두루 살펴본 뒤에 당신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결코 당신 자신을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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