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도시, 파리..
날이 좋은 10월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별반 다름없이 유모차를 끌고 길을 나섰다. 최소한 1번은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야 아이도 나도 편했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깜짝 놀라는 일을 마주했다. 내 뒤에서 커다란 개가 갑자기 짖으면서 내 옆을 쓱 지나가는 것이다. 정말 깜짝 놀랐다. 나는 보통 개를 무서워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번에는 꽤나 놀랬고, 무섭기까지 했다. 개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어서 더욱 무서웠다. 마침 그때는 한국에서 개에 정강이를 물려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시기라 평소 개를 무서워하지 않던 나는 개가 무서웠다. 그래서 그 개가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면서 내 다리를 스치며 지나칠 때 나는 너무 놀래서 뒷걸음질 치다 넘어질 뻔했다. 유모차에 아기도 있었기 때문에 모성의 책임감에 더욱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머쓱하여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30대로 보이는 개 주인 여성이 나한테 그때부터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집은 매우 거대했고, 얼굴의 인상은 험상궂었다.
오전 10시 정도, 개 주인은 근처 공원에서 개 산책을 시키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 여자 뒤에는 그녀의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자도 함께 있었다. 개 주인은 내게 욕을 약 5분 정도 끊임없이 하였다. 개와 마주친 골목길 시작점에서부터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기까지 쉴 새 없이 내게 욕을 퍼부었다. 표정을 보면 마치 나를 한대 칠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로를 건너 반대편 길로 아이와 옮겨갔다. 나와 평행으로 걸으면서 끊임없이 욕을 하였다. 나는 너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침을 질질 흘리는 개가 내 다리를 스쳐 지나가서 놀랬고, 순간 멈칫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어도 불어를 못해서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자기 개를 보고 놀랬다고 되려 화를 내는 상황이라니... 개 주인은 분명 이렇게 순한 개를 보고 어떻게 너 같은 동양 여자가 놀랠 수 있냐, 우리 개가 너를 물을까 봐 그렇냐, 우리 개는 그런 개가 아닌데 웬 오버 액션이냐.. 그래서 매우 화가 난 것 같았다.
프랑스를 전혀 못하는 내가 개 주인이 내게 욕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하며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개 주인을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나는 행인들의 표정을 보고 직감할 수 있었다. 5분 내내 나는 너무 수치스러웠다.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으나 불어도 못할뿐더러 너무 당황한 나머지 영어와 한국어 조차도 입에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무척이나 얼어 있었고, 머릿속이 하얀 상태였다. 요즘 불어를 배우고 있어서인지 '시누아'라는 단어가 귀에 순간 내리 꽂혔다. 중국인... 그렇다. 나를 중국인이라고 하면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순간 영어로 "I am not Chinese." 이렇게 내뱉었다. 그렇자 그녀는 "Shut up"이라고 하면서 더욱 소리를 지르고 마치 길 건너 내게 다가와 뺨을 때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나는 생명의 위협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개 주인이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욕설 받이는 끝이 났고 한동안 나는 멍한 상태로 있었다. 길을 걷는 내내 욕설을 들으며 길을 가는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방인이고, 동양인이라서 그들 눈에는 가난한 이민자로 밖에 안 보이는 그런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분명 같은 나인데 공간의 차이로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타인에게 비친 내 모습이 전혀 다른 내가 되었다. 서글펐다. 말 한마디 대꾸 못한 내가 너무 한심했다. 한국이었으면 어떻게도 대응을 했을 텐데 내가 왜 아무런 행동도 못하고 그냥 5분 동안 바보같이 상대방의 욕지거리를 듣고만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초반에 1000만 원 치 도난 사건을 겪은 뒤로 내가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둘째, 불어가 안된다.
셋째, 상대 여성이 너무 거구여서 무서웠다.
넷째, 바로 이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다. 개가 너무 무섭게 생겼다.
덩치도 크고 색깔은 검은색에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무슨 사냥개 같이 생겼다. 내가 무슨 대꾸라도 하면 주인이 개한테 바로 "물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 혼자 뿐인가? 바로 옆에는 17개월 아이가 유모차에 있다. 아기라도 물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불어도 못하는데 아기가 개에 물려서 큰일이라도 나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번 개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파리 살이 6개월도 안돼서 호텔 도난에 이은 두 번째 충격이다. 내가 그 개 주인에게 웃지 않고 째려보았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내가 동양인이 아닌 백인이었다면 그 주인이 그렇게 욕을 했을까, 내가 유모차를 끌지 않고 혼자 길을 가고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내가 한국어든 영어든 쌍욕을 날렸다면 내 태도에 겁먹고 나를 우습게 보지 않았을까... 집에 와서 뛰는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고 한참을 생각해보았다.
어디 속풀이 할 때도 없고 유일한 배출구인 프랑스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네이버 카페에 들어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써보았다. 댓글이 하나둘씩 달리는데 나를 위로해주는 댓글, 이런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댓글...
인종차별 경험들이 우후죽순 달렸다. 해외 살이 하면서 겪었던 인종차별 경험들이 이렇게나 다양하고 많은지 그제야 알았다. 댓글들로 인해 마음의 위안을 얻긴 했지만, 낭만과 예술의 도시라는 파리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현실이 서글펐다.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귀한 척 하지만 인간에 대한 경멸과 무시를 동시에 지닌 인간 군상에 대해, 이중성의 도시 파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