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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카 Jun 17. 2022

루소포비아: 전쟁 속에서 예술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인가

대구문화재단 예술담론웹진 대문 여름호에 실린 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00일이 넘었다. 전 세계 시민들의 염원과는 달리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국제사회 전반에서는 러시아를 향한 혐오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를 향한 연대와 지지를 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루소포비아(Russophobia)라고 불리는 러시아 혐오 감정은 러시아 및 러시아 문화에 대한 편견, 두려움 또는 증오를 나타낸다. 18~19세기 나폴레옹 시절, 러시아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루소포비아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점차 감소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잠잠하던 루소포비아를 다시 고조시켰으며, 21세기 국제사회 전반 걸쳐 전례 없는 수준으로 급격히 치솟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루소포비아가 퍼지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유럽 각국에서 예정됐던 시베리아 국립발레단, 볼쇼이 발레단, 마린스키 발레단 등 각종 러시아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다.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수년 전부터 논의 대상이었던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러시아 무용수들>을 <우크라이나 무용수들>로 작품명을 변경했다. 파리 오페라극장 총감독 알렉산더 니프(Alexander Neef)는 러시아 정권과 관련 있는 예술가들과 협업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예술가들과 연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친 푸틴계의 대표주자인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Valery Gergiev)는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자, 최근 뮌헨 필하모닉 예술감독직에서 파면됐다. 볼쇼이 극장 음악감독이자 수석지휘자인 투간 소키에프(Tugan Sokhiev)는 러시아와 프랑스 두 나라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정치적 입장 표명 문제로 압력을 받다 끝내 사임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러시아 연주자들의 공연이 취소되고, 연주자가 교체되기도 했다. 2월 25일(현지시간) 미국 카네기홀에서는 지휘자 게르기예프와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Denis Matsuev)를 대신해서 캐나다 지휘자 야닉 네제 세겡(Yannick Nézet-Séguin)과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가 빈 필하모닉과 협연했다. 국제 음악콩쿠르 세계연맹(WFIMC)은 4월 19일(현지시간) 러시아 정부 재정 지원을 받는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회원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톨스토이와 관련된 흔적을 지우고 있다. 러시아 발레, 음악, 미술, 문학 등 러시아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캔슬 컬처(Cancel Culture, 자신과 다른 생각을 드러낸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배척하는 행동 방식)가 일어나고 있다. 국경과 국적이 없다는 예술이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예술 및 예술가들을 차별하고 배척해도 되는 것일까? 인류를 하나로 통합하는 힘을 가진 예술을 국제사회 질서와 분리해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3월 6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자선 공연에서 "러시아 정치는 강하게 규탄해야 하지만 러시아 문화와 민족까지 마녀 사냥해서는 안된다"라며 정치와 문화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2021년 9월 22일부터 시작된 루이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에서 열린 ‘모로조프 컬렉션 : 현대 미술의 아이콘’(La Collection Morozov: Icônes de l'art moderne)전시는 사람들의 인기에 힘입어 2022년 2월 22일에서 4월 3일로 한 차례 연장한 뒤,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전시를 축하하기 위해 마크롱 대통령 내외도 전시 현장을 찾은 바 있다. 러시아 영토 밖으로 나간 적 없는 반 고흐, 세잔느, 마티스, 모네, 고갱, 피카소 등 거장들의 작품 200여 점이 파리에서 전시됐다. 연장을 결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침공했다. 필자는 전시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모로조프 전시장을 수시로 찾았는데,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입구에는 입장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늘 길었고, 전시장 내부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측에서는 매주 금요일 저녁 무료입장 및 VIP 멤버들은 입장 시작 1시간 전 관람 등 다양한 대안책을 내놨다. 3월 1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서방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도 혼란에 빠질 수 있다며 에펠탑 폭격 붕괴 영상을 제작해서 배포했다.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지역 내 불안감은 높아졌다. 미술관 측은 테러 위험에 대비하고자 물병 반입을 일절 금지했다. 미술관 직원들은 물병 수거 및 보관을 비롯해서 전시장 내 테러 대비로 분주했고, 시민들은 관람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200여 점의 그림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국제 정세로 인해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해석을 비롯한 전시장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체감했다. 모로조프 전시는 예술이 국제 정세 및 외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문화부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유럽연합 제재 명단에 오른 러시아 과두 정치인과 관련된 작품을 러시아로 반환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과두 정치인이자 억만장자 금융가인 표트르 아벤(Petr Aven)이 개인 소장하고 있는 표트르 콘찰롭스키(Pyotr Konchalovsky)의 <자화상>이라는 작품이다. 프랑스 정부는 푸틴 대통령의 돈줄 역할을 하고 있는 올리가르히와 관련된 작품을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올리가르히(Oligarch)는 고대 그리스의 과두 정치, 즉 소수자에 의한 정치 지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올리가르키아(Oligarkhia)의 러시아식 표기로 러시아 신흥 재벌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상당수가 망가졌다. 러시아 군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에서 대량의 예술품을 약탈했다. 이번 모로조프 전시에 걸려있던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박물관 소유의 발렌틴 세로프(Valentin Serov)의 <마르가리타 모르조바(Margarita Morozova)의 초상화>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요청에 의해 프랑스가 당분간 보관하기로 했다. 전시 초기, 양국 문화예술 교류 및 협력에 관해 우호적인 발언을 나눈 바 있는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 대통령은 이번 전쟁으로 국제 정세가 변하자 예술품에 정치적 제재 및 압력을 가하는 등 두 사람의 관계 및 양국 입장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정치권력이 문화예술에 개입하고 제재를 가해도 되는 걸까? 세계정세로 인해 예술품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예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여야 하는가, 아니면 시대에 따라, 외부 정세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좌) 표트르 콘찰롭스키(Pyotr Konchalovsky)의 <자화상> 출처: WIKIART

(우) 발렌틴 세로프(Valentin Serov)의 <마르가리타 모르조바(Margarita Morozova)의 초상화>

 출처: 게티이미지


그렇다면 전쟁 속에서 우리는 예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예술 본연의 모습은 무엇이며, 예술의 가치 및 역할은 무엇일까? 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담은 각종 예술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연합(Unis pour l'Ukraine)'이라는 슬로건 아래, 수많은 예술가들이 서로 연대하여 콘서트를 비롯한 각종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프랑스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Gautier Capuçon)은 우크라이나 국기색으로 변한 에펠탑을 배경으로 바흐 평균율 1번 프렐류드 연주를 통해 전 세계 시민들에게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지지와 연대를 호소한 바 있다. 조지아 출신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Khatia Buniatishvili)는 프랑스 가수 카를라 부르니(Carla Bruni)와 콘서트를 열고, 파리 챔버 오케스트라와 우크라이나 국가를 연주하고, 프랑스 뉴스룸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뒤, 우크라이나 국가를 연주했다. 그녀는 음악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위한 지지와 연대 활동에 적극적이다.   


전 세계 곳곳의 벽에는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그림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파리 13구 거리(rue Bout)에는 한 소녀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서 장갑차를 발로 밟아서 찌그러트리며 걸어가는 벽화를 볼 수 있다. 이는 스트리트 아트로 유명한 세스(Seth)의 작품이다. 그는 주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거리 벽화를 많이 그리고 있는데, 전쟁 발발 3일 후, 이 그림을 벽에 그렸다. 또한, 우크라이나 국기 색인 파란색과 노란색을 활용한 우크라이나 소녀의 거대한 프레스코화가 파리 13구(131 rue de Patay) 한 아파트 외관 4개층에 걸쳐 걸려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거리 예술가 C215의 작품으로 파리 13구 시청과 협력하여 작품을 설치했다.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과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초상화 밑에 적혀 있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나는 신도, 우상도 아닌 단지 국가의 하인이기 때문에 내 사진이 사무실에 걸려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신 아이들 사진을 걸어두고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것을 보길 바란다.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 " 


(좌) 파리 13구에 있는 세스(Seth)의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세요(Stand with Ukraine)> 벽화, 출처: 모니카 박 (중) 파리 13구에 있는 C215의 우크라이나 지지를 위한 소녀의 프레스코화, 출처: 모니카 박

(우) 파리 13구 거리 벽화. 소년의 가방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져 있다. 출처: 모니카 박



팬데믹 동안 예술이 전 세계 시민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듯이, 전쟁 중에도 그 어떤 구호 또는 외침보다 잔잔한 음악과 말이 없는 그림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강한 울림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예술로 하나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전쟁을 이제 그만 멈추고,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 아닐까? 예술이 삶에 필요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의 말처럼 지금 우리는 그 어떤 논쟁보다도 어떻게 하면 전쟁을 멈출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대구문화재단 예술담론웹진 대문 2022 여름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daemun.or.kr/?p=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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