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에서 우리들은 나름대로 바빴다..
올해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두 달 동안 집안에만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초반 일주일이 힘들지 그다음부터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적응이 되어가는지 집안에만 있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는 마치 단식과 같다. 초반에 힘들지 가장 힘든 그 지점만 넘기면 단식이 편안해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후 자가 격리가 풀렸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격리 해제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알아보기, 아이 학교 알아보기였다. 우리 가족은 3년 주재원으로 파리에 왔다. 올해 6월 말에 계약 만료이다. 사실 작년 겨울부터 그다음 스텝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올해 초에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까지 된 상황이었다. 일본 발령은 본사에서 경쟁으로 선발되었고,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가는 자리였다. 일본 집과 학교까지 알아보던 상황에서 뒤집어엎은 이유는 일본 방사능 등 아이 건강 상의 이유였다. 그전에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데 다 되고 나서 그제야 방사능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는 2월 중순, 그때부터 다시 다음 자리를 알아봐야 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말 그대로 무직 상태가 될 수도 있는 인생 모험이었다. 신랑은 그때부터 부지런히 자리를 알아보았고 (여기서 신랑 자랑 좀 하겠습니다..) 총 3군데에서 오퍼를 받았다. 다른 조직에서 신랑을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 자리는 꽤나 좋은 자리였고, 진급도 약속된 자리라 진행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본사의 부사장 급 임원이 신랑에게 현재 부서에서 계속 일하면 좋겠다고 했다. 결국 본사 2군데 중에서 최종 결정하였다. 3년간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때는 올해 3월, 작년 말부터 시작된 다음 스텝을 위한 여러 과정들이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코로나가 터져서 모든 게 스탑 되었다. 재택근무로 가능하다지만 안 그래도 느린 프랑스가 재택근무로 인해 더욱 느려졌다. 신랑의 업무 및 다음 자리 프로세스는 속도가 늦어졌고, 중요한 체류증 만기 날짜가 스물스물 다가오고 있었다. 5월이 되자 많이 불안해졌다. 경시청이 문을 닫았으니 체류증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자가 격리가 끝나도 재택근무는 계속되었고, 현지에 계속 남아서 본사 소속 직원으로 일하게 되는 과정을 인사 담당과 연락하고, 체류증 문제도 계속 푸시하고, 그에 따라 집도 알아봐야 하고, 아이 학교도 알아봐야 했다. 그동안은 주재원이라서 회사에서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지만, 현지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면 집과 학교 모두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집도 보러 다니고, 아이 학교 때문에 서류 준비해서 시청도 가고 했었다.
2020년 상반기, 나는 글을 쓰려고 계획했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낮에 노트북 켜서 내 책을 쓰고,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런 멋진 상상을 했었다.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 끝났다. 아이와 신랑 모두 집에 있으니 삼시 세끼 차려야 하고, 4살 어린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하려니 엄마가 옆에서 챙겨줘야 했다. 온라인 수업 끝나면 같이 놀아줘야 하고 하루 하루가 바빴다. 그리고 집도 알아봐야 하고, 체류증 문제는 늘 불안하게 만들었다. 현재 체류증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되었다. 사방팔방으로 알아본 결과, 일단 예약만 잡으면 체류증 만기 되더라도 괜찮다는 얘기가 다수였다. 특수한 상황이라 예외도 그만큼 인정이 되는 것 같았다. 원래 프랑스는 상황에 따라 다른 싸데뻥(Ca depend)의 나라가 아니던가... 글을 쓰는 현재는 체류증 발급 진행 중이고, 발급받기까지 6개월이 소요되므로(역시 프랑스의 느린 행정) 그때까지는 최대한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몸을 사리는 것이 좋단다.
집도 종종 보러 다니고 있고, 16구 시청에 가서 아이 학교 신청도 완료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청에 갔는데 생각보다 학교 등록은 쉽게 되었다. 행정 업무가 느린 프랑스인데 앉은자리에서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것을 보고 여기가 프랑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니 그 자리에서 바로 집 근처 마떼흐넬에 등록시켜주더니 담당 학교 원장 연락처를 주면서 직접 연락해서 예약을 잡으란다. 원장에게 바로 전화를 했고 미팅 약속을 전화로 쉽게 잡았다. 차근 차근 설명을 잘 해주는 원장은 아이가 프랑스어가 서투니 여름학교를 조금 다니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며 여름학교 등록을 권하였다. 나의 많은 질문에도 친절하게 상세하게 답변해주었다. 시청 직원도 마떼흐넬 원장도 모두 내가 예상했던 도도하고 깐깐한 프랑스인들이 아니었다. '이건 뭐지? 코로나 한번 겪더니 사람들이 변했나?' 아니나 다를까, 시청 가는 길에서 몇 번이나 아시안이라고 눈총 받고, 심지어는 자기와 사회적 거리를 두지 않고 길을 걸었다고 따지고 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그렇지. 프랑스인들이 변한 건 아니었어.'
기한을 정해놓고 사는 것과 기약 없이 평생이라 생각하며 사는 것은 마음가짐 부터가 다르다. 3년만 살 거니까 프랑스어는 기본 정도만 배워야지 했던 내가 이제 발등에 불 떨어지듯 프랑스어를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는 또 어떻고... 국제학교 다니다 여길 떠날 것이니 한국어와 영어 위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이제 프랑스어만 사용하는 공립학교에 가게 되어 프랑스어를 익혀야 할 판이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를 일이다. 주재원이 아닌 현지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프랑스에서의 나의 삶은 또 어떻게 펼쳐질까... 내 안에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