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말 듣는 것은 포기했고, 내 기분이라도 안 나쁘면 다행입니다.
"오렌지 주스 1개 더 가져올래요?"
"네?"
"오렌지 주스 1개 더 가져오시라고요"
서로 마스크 낀 채로 말을 하는데 잘 안 들리거니와 무슨 말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
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영어로 내게 통역해준다.
그제야 알아들었는데, 그 직원은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과 제스처를 취해서 내가 꽤 기분이 안 좋았다.
본인이 두 개로 계산했으니 나보고 한개를 더 가져오란다.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논리인가?!
몇 초 침묵이 흐른 뒤, 이 말은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마침내 입을 뗐다.
"저는 1개 샀고, 당신이 2개로 계산했으니, 1개는 취소하는 게 맞죠. 당신이 잘못했는데, 왜 내가 2개 가져와야 해요? 내가 잘못되었나요?"라고 영어로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 직원은 취소하는 게 서툰지 2.45유로를 돌려주는데만 한참 걸렸다.
마침대 동전을 딱 바닥에 놓는다. 나는 동전을 일일이 집어 들고는 프랑스인들이 특히 잘하는 제스처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행동을 처음으로 해 보이며 슈퍼를 나왔다.
그동안 나는 이에 관한 글을 언젠가는 꼭 한번 써보고 싶었다. 프랑스에 거주한 지 3년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슈퍼 또는 마트에서 직원이 계산을 정확하게 한 적이 거의 없다. 어떨 때는 연일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5일에 한번, 7일에 한번... 그럴 때마다 다 메모를 해놓았어야 하는데 대략 내 어림짐작으로 평균 4일에 한번 꼴이라 통계를 내어본다. 잦은 계산 실수를 발견하고는 이제는 구매 후 영수증을 그 자리에서 꼼꼼히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여기 까지라면 왜 프랑스인들은 계산할 때 꼼꼼하지 못할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듣기로는 프랑스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일할 때 한마디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일머리가 없다는 말도 많이 들어보았다. 특유의 여유 있고 낙천적인 국민 성향도 있을 것이고, 계산을 잘못했다고 해서 손님이 뭐라고 하거나, 상사가 크게 혼내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업무를 보며 그래서 실수가 잦다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절대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한다는 것이다.
"내가 계산 잘못했네요. 미안합니다." 이 말이 그토록 어려운가.
계산을 잘못했을 때 계산원의 반응은 정말 가관이다. 몇 가지 실화를 들어보자면,
<실제 상황 1>
"1+1인데, 행사 적용이 안되었네요."
"네? 어디 봅시다." "안느, 여기 좀 와봐. 이거 행사 상품이야?" "행사 상품이네요. 여기 돈이요." -끝-
미안하다, 잘 가란 말 한마디 없다. 표정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이다. 자기 잘못도 아니고, 너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일상적인 일 중 하나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냥간다.
<실제 상황 2>
"저기요, 2유로짜리인데 3유로로 여기 계산되었네요."
"내가 계산했어요? 아닐 텐데..." 귀찮다는 듯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맞아요. 당신이 계산했어요. 잘못되었어요."
"어디 봅시다." 일어서더니 해당 상품 앞으로 간다. 그러더니 자기 자기 자리로 와서 1유로 꺼내더니 나에게 큰소리로 비웃듯이 하는 말.. “꽁떵?!" (만족하니?)
아우, 열 받는다. 본인이 잘못해놓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미안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나한테 큰 소리로 비웃으며 만족하니? 라고 한다. 이 말에는 분명 고작 1유로 가지고 이렇게 시간 쓰고, 에너지 쓰냐..라고 들린다.
상대는 양팔에 문신 가득한 건장한 남성이다. 발음을 들어 봤을 때 프랑스인은 아니다.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계 같다. 무서워서 나는 그냥 아무 말도 못 하고 나왔다. 이런 날은 종일 기분이 안 좋다. 그 집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기분을 종일 달고 살지 않았을 텐데 왜 들어가서 이런 일을로 내 하루를 우울하게 만드는지 자책한다.
계산원은 계산을 잘못하면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몸에 베여 있다. 그들이 계산을 잘못해서 고객이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시간을 허비하며 찾아왔고, 다시 계산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 아직도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3년 동안 수많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속으로만 부당하다 생각했고, 심지어 상대는 영수증의 잘못된 것을 찾아서 돈을 받아내는 나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볼 때도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단 50센트도 내 돈이다. 땅을 파봐라. 1센트가 나오나. 그들이 나를 1유로도 없으면 안 되는 가난뱅이로 여겨도 난 상관없다. 내가 가난하면 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지만 나는 가난하지 않으니까. 책에서 워런 버핏 같은 부자들은 작은 돈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글을 읽었다. 나는 부자가 될 것이므로 작은 돈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정말로 3년 동안 마트 장보기 하면서 까르푸에서 장 봤을 때 딱 한번 젊은 남자 직원이 "빠흐동(미안해요)" 하는 들어봤다. 그 외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하도 궁금해서 프랑스 한인 카페에 질문글을 올렸다. 댓글은 수두룩 달렸다. 댓글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인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셈이 돼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법적인 문제로 확대될 경우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함부로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초기에 프랑스에 정착하여 살 때 많은 분들은 나처럼 이런 상황에 많이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사실 관계 앞에서 법적인 상황까지 미리 계산해서 사람 사이의 인지상정, 도리 등은 깡그리 무시되고 마는 서양의 법치주의, 개인주의, 논리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던가. 나는 프랑스에 살고 있으니 받아들이기로 했고 나도 똑같은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쉽사리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려고 한다.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상황에서 내가 먼저 미안하다며 숙이고 들어갔을 때 상대가 나를 더욱 우습게 알고 인종차별까지 하는 상황을 종종 접하고는 나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3년 만에 처음으로 직원에게 할 말을 한 날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무슨 해코지라도 받을까 봐 두려워서 말을 못 했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할 말은 하고 사니까 내 속에 쌓이는 게 없었다. 내가 말을 기분 나쁘게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사실을 강하지만 부드럽게 얘기했더니 상대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있고 나도 기분이 한결 낫다. 그리고 나 정도의 불어 수준이면 어쭙잖은 불어로 말하기보다는 그냥 능숙한 영어로 하는 것이 차라기 더 낫다. 어버버 하는 불어로는 아무리 사실을 기반으로 논리 정연하게 말을 전달하려 해도 상대방의 귀에는 우습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의사소통할 때는 언어가 능숙해야 한다. 나는 오늘 프랑스어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 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