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병이라고 들어보셨나요?
프랑스 행정 처리 속도는 느리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말로 프랑스 행정 처리는 늦을까? 얼마나 늦을까? 2022년을 살아가는 최첨단 시대에 왜 이리 늦을까? 뭐가 문제일까?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언어가 전혀 되지 않아서 행정 처리를 하는데 불편함이 많았다. 주재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회사에서 도와줬다. 처음 프랑스에 유학 온 학생들은 한인 교회를 많이 찾는다고 들었다. 초기에 어학 실력도 부족한 데다 행정 절차를 잘 모르니 현지에서 오래 살고 계신 한국인 분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주재원 계약이 종료됨과 동시에 집을 알아보는 것부터 건강 보험을 비롯한 각종 행정 처리를 우리가 직접 해야 했다. 이사를 하면서 신분증에 적힌 집 주소를 변경하기 위해 그즈음 경시청에 가서 신청했다. 정확히 2021년 11월 낭테흐(Nanterre) 경시청에 가서 새로운 신분증, 한국으로 치면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한국에서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는 1주일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난다. 이보다 조금 늦거나 빠를 수는 있지만 대략 이 정도였다.
이곳 프랑스는 정확히 1년 걸렸다. 주소 변경을 위해 1년 소요됐다. '나는 어느 나라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정말이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이다. 프랑스어 자격시험 합격증을 받는데도 1년이 소요됐다. 원래는 8개월 정도 걸렸는데, 나머지 4개월은 합격증이 집으로 제대로 도착하지 않고 반환되어 관련 기관 서류 보관함에 고이 잠자고 있었다. 집주소를 정확히 기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반환된 이유는 무엇이며, 반환됐다면 찾으러 오라고 연락을 줘야 하는데 연락도 주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일까?
경시청(Préfecture)은 각종 면허증, 외국인등록증 등을 발급해주는 공공 기관으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마다 경시청이 있다. 프랑스인 오헬리엉이 쓴 책 <지극히 사적인 프랑스>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파리 서쪽에 위치한 낭테르 도청의 구글 평점은 정말 최악이다. 평가 멘트를 읽어보면, 사람들의 분노가 절절이 느껴진다. 별점을 0개만 주고 싶었는데, 최소 별점이 1개라서 1개를 준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불만을 남긴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책에서 낭테르 경시청이 언급되어 반가우면서도 평점 최악의 악명 높은 경시청이란 말에 겁도 났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이 바로 저긴데...
그날 낭테르 경시청 현장이 생생하다. 준비해야 하는 서류 리스트에는 분명 신분증 사본이 없었는데, 입구에서 자료를 검사하는 직원이 신분증 사본이 없다며 가져오라고 했다. 다행히 현장에 프린터기가 있었다. 낡은 구식 프린터기에 겨우 신분증 사본을 급하게 준비했다. 준비 자료를 다시 확인받은 뒤,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번호표도 없고, 번호가 뜨는 전광판도 없다. 유리 안에 보이는 각 창구마다 행정 직원들 뒤로는 각종 서류가 빽빽했다. 쾌쾌한 오래된 종이 냄새가 유리창 너머, 마스크 너머, 내 코끝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역시 서류의 나라다.
마이크를 통해 신랑 이름이 불렸다. 어느 창구로 가야 할지도 몰라서 이리저리 우왕좌왕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있는 방은 외국인 전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언어 소통이 원활한 것은 아니었다. 입구에서 필요하다던 신분증 사본은 요구하지도 않았다. 각종 서류가 많다 보니 우리 신분증 찾는데도 한참 걸렸다. 1년 동안 내 신분증은 어디를 거쳐 지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일까? 신분증 받은 날, 우리는 조촐한 축하 파티를 했다. 신분증 수령이 뭐라고 자축 파티까지 하게 될 줄이야.
<지극히 사적인 프랑스>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목차 제목이 있다. '행정 지옥은 진행형, 복지 천국은 옛말'. 다음 장을 넘기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프랑스 행정'이라고 적혀있다.
캬! 제목 한번 잘 지었다. 말 그대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프랑스 행정이다. 프랑스 사람조차 자신의 국가 행정 시스템을 이렇게 보는데, 하물며 말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국민 정서도 잘 모르며, 행정 절차에도 익숙하지 않은 처음 이 땅을 밟은 외국인들은 오죽하겠는가.
다음은 책에 나온 구절들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행정 서비스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프랑스의 행정 서비스는 정말, 정말 최악이다. 그야 말 로 '지옥 같은 행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유를 들어보면 누구나 납득할 것이 다. 우선 일 처리가 너무 느리고, 행정 기관의 운영 시간도 짧다. 게다가 행정 기관이 너무 많고 복잡하다.'
실제 프랑스 사람들은 자국의 행정적인 문제점을 두고 '프랑스 병'이라고 부른다. 그들도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 행정 기관이 많아서 결재 라인이 길어지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또한, 전자 시스템이 아닌 종이 서류로 처리하다 보니 중간에 누락되고, 분실되기도 하는 등 시간이 꽤 소요된다. 그들끼리 의견을 좁히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워낙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말하는 민족이다 보니 회의라도 한번 하면 끝이 없다.
프랑스 고질병 때문에 ‘브레인 드레인(Brain drain)’, 즉, 인재 유출 문제도 심각하다. 속도가 중요한 스타트업 같은 경우 프랑스에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결재받으려면 함흥차사인데 신기술 하나 개발하고 특허받는 과정에서 이미 다른 나라에서 똑같은 기술을 개발해서 특허까지 끝낼 것만 같다.
코로나 19로 인해 일상에서 많이 들 어본 단어 중에서 모더나와 아스트라제네카가 있다. 미국 모더나 CEO인 스테판 방셀 (Stéphane Bancel)은 마르세유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 대학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했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최고경영자 파스칼 소리오(Pascal Soriot)는 호주로 떠났고, 프랑스와 호주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코로나 예방 백신을 개발한 제약회사 CEO이자 프랑스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처리가 느리고, 행정 규제가 많기 때문에 사업가들에게 어려움이 있다.
또한, 사회주의 전통의 뿌리를 가진 프랑스는 자본주의를 거북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서는 돈이 많아도 자랑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부자도 겉으로는 검소하게 보인다. 프랑스에서 샤넬 또는 루이비통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외국인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백신 개발에 성공한 제약회사의 두 CEO는 이러한 자국의 행정적인 문제점을 간파하고 해외로 빠져나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업에 성공했다. 이 외에도 프랑스의 고질적인 행정 문제로 인해 해외 곳곳으로 빠져나간 인재들은 많다.
책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공무원과 민원인의 관계를 보면 공무원이 갑이다. 공무원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꼭 그 공무원의 스타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밀어붙인다. 담당 공무원의 심기를 거슬러서 일이 틀어지면, 모든 일이 그 자리에 서 멈춘다. 그냥 끝이라고 봐야 한다. 그 사람이 나의 일을 처리해 주지 않으면 민원인으로서는 해결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항상 공무원을 만날 때는 아주 밝은 미소를 짓고,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프랑스에는 이민자들이 많다. 그들은 프랑스 땅에 살기 위해 외국인 거주증을 받아야 한다. 난민에 대해 부정적이 시각의 공무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일이니 업무를 하긴 하지만 난민들 또는 이민자들을 매우 무시하며 대하기도 한다. 파리 경시청에 갔을 때, 수많은 각종 이민자들을 보았고, 프랑스 공무원들은 마치 ‘가난한 너네가 부자인 우리 땅에 살러 온 거니까, 내게 잘 보여봐.’라는 듯 보였다. 그들에게 밑 보이면 이 땅에서 추방될 수도 있기 때문에 어쨌든 갑을도 아닌 갑병의 관계로까지 갈 수도 있다. 나도 파리 및 낭테흐 경시청에 몇 번 가봤지만, 갈 때마다 공무원들이 무섭고, 늘 마음 졸이고, 체류증 못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괜한 긴장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