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프랑스어
프랑스에 거주 예정자들이 많이 하는 질문 중에서 ‘프랑스로 3년 주재원으로 파견 예정인데 프랑스어를 꼭 할 줄 알아야 하나요? 떠나기 전에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나요? 그냥 영어로 대화하면 안 되나요?’가 많다. 프랑스인과 결혼해서 계속 프랑스에서 살 계획이라면 당연히 현지 언어를 배워야 하지만 1년에서 3년 정도 주재원 파견일 경우는 애매해진다. 새로운 언어를 처음부터 배우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에너지도 많이 들기 때문에 굳이 힘들게 배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차라리 공부하는 시간에 미술관 한번 더 가고, 좋은 풍경을 한번 더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제한된 시간의 기회비용을 따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프랑스라는 나라는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생활하기 힘든 곳이다. 다른 유럽 국가도 그런가 싶어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주변 국가로 여행 갔다가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관광지에 위치한 카페, 식당, 호텔에서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한 번도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세계 관광 기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가장 많은 해외 관광객들이 방문한 국가는 프랑스다. 8,900만 명이 프랑스를 다녀갔다고 한다. 2019년 9월 마스터 카드가 발표한 ‘2019 글로벌행선지도시지수(Global Destination Cities Index 2019)’에 따르면, 2018년 외국인이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로는 전 세계 200개 도시 가운데 방콕에 이어 파리가 2위를 차지했다. 2018년, 1,9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파리를 찾았다. 이처럼 세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서울 총면적 1/6도 안 되는 조그만 도시 안에 있는 각종 박물관, 미술관, 에펠탑을 보겠다고 몰려드는데, 관광 산업 인프라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는 글로벌 언어인 영어 구사력이 낮은 편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관광객을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영어를 구사할 줄 아 는 직원을 고용하는데 왜 프랑스는 유독 그렇지 않을까? 기본적인 안내 표지판조차도 영어는 잘 보이지 않아서 입구와 출구조차 찾기 힘들다. 그럼 왜 프랑스 정부는 이를 개선하지 않는 것일까? 분명 프랑스 정부도 자국 경제를 가장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는 관광 산업을 더욱 키우기 위해서는 관광 인프라를 구축해야 관광객들이 더 많이 유입된다 는 것을 알 텐데 말이다.
내가 조심스레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사람들의 성향과 프랑스 사람들이 모국어를 생각하는 태도, 프랑스 사람들의 세계관에 그 답이 있다. 도도한 파리지앵이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콧대가 높기로 유명하고, 그중에서도 문화, 역사, 정치의 중심인 파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콧대가 하늘을 찌른다. 지금은 미국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과거 19세기, 20세기만 해도 프랑스는 세계 강국이었다. 과거 위상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영어가 글로벌 언어라고 속으로 인정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 편이다.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이고 정신이 담겨 있는데, 자존심 강하고 자국 문화에 자부심 높은 프랑스인들에게 모국어는 곧 그들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이다. 그래서 공공시설에도 쉽게 영어 표지판을 보기 힘들고, 공공 기관 직원들 중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유치원에서도 모국어 교육을 중요시한다(한국에 비하면, 만 3세에서 5세 유치원생이 영어를 배우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외국인이 프랑스어를 배우겠다고 하면 두 팔 벌려 좋아한다. 시청을 비롯한 곳곳에 무료 또는 저렴한 프랑스어 교실이 많다.
기본적으로 영어를 못하는 프랑스 사람들도 있지만, 할 줄 알아도 못하는 척하는 프랑스인들도 있다. “제가 프랑스어를 잘 못해서 그런데 혹시 영어 할 줄 아세요?”라고 물으면, 이런 질문이 불쾌하다는 듯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답한다. 근데 이 한 마디가 내게는 ‘그런 건 왜 물어요? 당신이 프랑스어로 말해야지, 내가 왜 영어로 말해야 돼요?’라고 들렸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봐주지 않는다. 때로는 화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결론은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를 못하면 인종차별당하기도 쉽고, 무시도 많이 받으며, 한마디로 생활이 고달파진다. 고로, 프랑스에서 단 1년을 살아도 기본적인 프랑스어는 할 줄 알아야 삶이 편해진다.
2020년, 넥플릭스(Netflix)에서 흥행했던 TV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주인공 에밀리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른 채, 주재원으로 시카고에서 파리로 1년 파견 근무를 하게 된다. 새 직장 동료들은 그녀가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로 말하는 등 그녀의 사정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다.
어느 날 카페에서 에밀리와 동료 뤽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미국인들은 ‘live to work(일하기 위해 산다)’ 프랑스인들은 ‘work to live(살기 위해 일한다)’라며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에 관한 주제로 서로가 팽팽한 의견 대립을 한다. 근데 잠깐! 여기서 한국은 어떨까? 한국은 아마도‘work to work(일하기 위해 일한다)'이지 않을까 싶다. 슬픈 현실이다.
에밀리가 뤽에게 일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하자, 뤽은 놀라면서 행복이 뭔지 모르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에 에밀리는 물러서지 않고 그건 좀 오만한 소리 아니냐고 되받아 친다. 뤽의 마지막 대사가 내 무릎을 탁! 치게 했다.
“You came to Paris and you don’t speak French. That is arrogant.(파리에 와서 프랑스어도 안 쓰는 게 오만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