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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Apr 25. 2023

일을 미룰 때 바로 써먹는 치트키 (4)

진입로 내기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혹은 할 일이 있는데, 그걸 떠올리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딴짓을 하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겁니다. '미루기의 쳇바퀴'를 아직 덜 겪어봤다면(?) 자신이 뭔가를 미룬다는 건 알아도 미루는 순간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파악하지 못해요. 이 미싱 링크를 찾는 것이 미루는 버릇을 개선하는 데 가장 중요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미싱 링크'는 다음과 같이 압축해 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

모호함

완벽주의  

동기 부족(신경전달물질 부족)

혹은, 전부 다.



오늘은 일을 미루게 되는 원인 중 하나인 '모호함'을 어떻게 다루는지 얘기해 볼까 해요. 모호하다는 건 할 일이 모호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불분명하고, 그 일을 얼마나 할지, 어느 시간에 할지, 어떤 장소에서 할지 같은 항목이 전부 공란인 상태예요. '시험공부를 해야 해' 또는 '마감을 맞춰야 해' 같은 생각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것들은 마치 할 일처럼 보이지만, 위의 항목들을 갖춰 주지 않으면 그저 막연한 압박에 가깝습니다. 당연히 부담감과 불안을 불러일으키죠. 그럼 미루겠죠. 다른 표현으로, 우리는 '압도'됩니다.


이 막연함과 모호함을 다루는 방법은 사실 정해져 있습니다. 일을 작게 나누는 거예요. 많이 들어보신 이야기죠. 그래서 오늘 쓸 이야기는 '치트키'라기엔 조금 머쓱합니다. 하지만 미루기를 고치는 데에 마법은 없습니다. ADHD 약을 먹어도 제가 마법처럼 책상에 앉아 자동으로 작업을 척척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약물 치료를 받아도 별 짓을 다 동원해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어요.


일을 나눈다는 건 분량을 작게 만든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모양을 잡아주는' 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커다란 바위를 돌멩이로 부수는 작업을 상상하기보다는, '할 일이라는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가느다란 '진입로'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상상하기를 제안해 봅니다.





일을 작게 나눌 때의 함정


저는 할 일을 나눌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분량'으로 쪼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레포트 다섯 장을 써야 한다면 '레포트 1장 쓰기' 다섯 개로 일을 나누는 거죠. 물론 이 방법도 쓰기는 씁니다. 단, 제가 그 일을 한참 하고 있을 때에 써요. 중간중간 보상을 주면서 진행하려고요. 그러나 이미 미루고 있는 일을 이렇게 나눠 봤자 그냥 계속 미루게 됩니다. 저를 압도하는 막연함과 모호함은 분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두번째로 빠지는 함정은, 일을 작게 나누기는 나눴지만 정말 해야 할 일을 귀신같이 피해가면서 나누는 겁니다. 아까처럼 레포트 다섯 장을 써야 한다고 해볼게요. 레포트를 쓰기까지의 행동들을 잘게 나누다가 마지막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로 나누는 식입니다. 또는 기획서를 쓸 때 '자료 조사'부터 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자료 조사.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겠습니다. 한창 미루고 있을 때 자료 조사부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웹서핑과 유튜브와 SNS로 흘러가겠지요...?



그럼 이 함정들을 피해서 진입로를 뚫어 보겠습니다.









진입로의 조건


지금 당장 미루는 상황일 때, 일을 시작하기 위한 진입로에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만들어요


보통은 어려운 일을 먼저 해치우라고들 하는데요, 저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입니다. 제게는 오히려 작고 쉬운 일부터 시작해서 몰입에 시동을 걸고 에너지를 예열하는 방법이 더 잘 맞아요. 기획서 쓰기와 관련된 행동 중에서 그나마 머리와 에너지를 덜 쓰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쉽지만, 할 일과 확실하게 연결되도록 만들어요


일을 미루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미루고 있던지간에 그 일을 대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거예요. 진입로는 제가 무서워하는 바로 그 부분과 슬쩍 연결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해요. 

기획서 작성은 제가 정말 잘 미루는 일 중 하나인데요. 오랜 세월 동안 미루고 또 미루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저는 뭔가를 '새로 만드는' 것이 굉장히 버거운 것 같아요.(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드는 게 아닌데도요) 저는 오늘도 쩌리인데 갑자기 반가사유상을 조각하라는 미션을 받은 것 같달까요. 그러면 진입로는 바로 이 지점에 내야 합니다. 나는 여전히 반가사유상을 만들 수 없지만(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반가사유상을 빚을 흙에 손은 대게끔 만드는 거예요. 이 부분을 고려하자면, 저의 진입로는 어쨌든 기획서 파일을 여는 행동을 포함해야 되겠어요.




언제든 다시 진입할 수 있는 형태로


오늘 이야기의 포인트는 이 부분입니다. 일을 작게 나눠서 진행한다는 건 선형적이고 단계적인 행동으로 생각됩니다. 작은 일로 시작해서 그대로 쭈-욱 완성까지 가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아닙니다. 왜 시작한 김에 왕까지 깨야 하죠? 이것도 완벽주의가 스민 생각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완벽주의보다는 완료주의가 좋다고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완료'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압박이 되는 듯합니다. 벼락치기로 완성하는 일이 잦다 보니 '시작하면 완성해야 해'라는 생각도 더 강화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미루기가 더 심해졌던 것 같아요. 지금 시작하면 반가사유상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시작을 못하죠.(만약 일을 여유 있게 시작해서 '오늘은 반가사유상이고 나발이고 흙 반죽까지만 한다'였다면 좀 덜 미뤘을 겁니다.)


진입로는 '단계'가 아닙니다. 진입로로 설정한 행동은 다시 반복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합니다. 왜냐면 일을 하다 보면 당연히 산만해질 때가 있을 거고, 또 도망칠 거고, 또 딴짓을 할 거거든요. 그때마다 언제든 반복해서 할 일로 돌아갈 수 있는 행동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시간 제한, 또는 정지점을 둡니다


진입로가 될 행동을 정했더라도, 진입로에 오를 동기가 없으면 안 되겠죠. 그런데 없는 동기를 만들어내기는 어렵습니다. 보통은 '이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야', 또는 '이 일을 하면 이런저런 불이익이 생겨' 같은 생각이 동기를 줍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안 좋아져서(?) 그걸 피하고자 일을 더 미루게 됩니다.


이 동기 결여를 보완하기 위해서, '3분만 하고 다시 논다'와 같은 시간 제한을 추가합니다. 나는 이 일이 정말 하기 싫지만 3분만 하고 돌아오면 다시 놀게 해주겠다고 꾀는 거예요.(물론 1분도 괜찮고, 30초도 괜찮습니다. 저는 이 방법을 쓰면서 3분짜리 모래시계로 시간을 재기 때문에 3분이 되었을 뿐이에요.)


시간이 아니면 정지점을 추가해도 됩니다. 방 청소를 해야 한다면 '쓰레기 두 개만 버리자. 그러고도 하기 싫으면 그만두자'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정지점은 '쓰레기 두 개'죠. 쓰레기를 두 개 주웠는데도 청소를 못하겠다면 꼭 약속을 지켜서 쉬게 해 주세요. 우리의 진입로는 끝까지 도달했다면 유턴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진입로 끝까지 도달했다면 고속도로로 나가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진입로에 들어갈 땐 이 부분을 잊기로 해요. 










그리하여, 기획안 쓰기에서 제가 자주 써먹는 진입로는 '파일을 열고 3분 동안 아무말(진짜 아무말) 쓰는 것'입니다. 다시금 압박감에 짜부라지거나 산만해져서 웹소설을 보기 시작하더라도 이 진입로를 통해 할 일로 돌아옵니다. 아무말 쓰다가 유튜브 보고, 아무말 쓰다가 담배 피러 나갔다 오는 식이죠. 사실 제가 기획안보다 더 무서워하는 건 디자인 시안을 만드는 겁니다. 이게 본업이고 몇 년이나 해 왔는데도 새롭게 부담스러워요. 이때 자주 사용하는 진입로는 '파일을 열고 필요한 내용을 기본 폰트로 얹어버리기' 또는 '동그라미 네모 세모 그리기'입니다. 물론 일이 진행되면 진입로의 형태도 다시 설정해야 할 거예요. 기획서의 기본 틀을 잡는 작업과 디테일을 보강하는 작업은 성격이 다른 일이잖아요. 어제 먹혔던 진입로가 오늘은 안 먹힐 수 있어요. 당연한 일이니까 놀라지 마시고 매일매일 다른 모양의 진입로를 만들어 봅시다.


요약하자면, 진입로는 다음과 같은 행동입니다. 



1. 내가 피하고 싶은 작업과 연결되는 행동 

2. 하지만 비교적 쉬운 행동 

3.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행동 



이번 글에서는 오만 데서 다 추천하는 '일 작게 나누기'를 진입로라는 이미지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방법 자체는 다를 것이 없지만, 이미지를 바꾸는 데서 얻는 인사이트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지금 어떤 일을 미루고 있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 진입로만 구상해보면 어떨까요? 아, 저와 같은 ADHD 친구들은 약을 먼저 먹고요! 









+ 고급 기술


"당장 오늘이(내일이) 마감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시작을 하면 반드시 완성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집니다.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이럴수록 더 미루게 되더라고요.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될 때까지요.

이럴 때 저는 남은 시간을 쪼개고, 그 시간을 하루처럼 생각해 보려고 애씁니다.

예컨대 마감까지 6시간이 남았다면, '6시간 안에 완성해야 해'가 아니라 '1시간 동안 어떤 일(쪼갠 일)을 완료하자'로 마인드셋을 변환하는 거예요. 1시간을 하루처럼 생각하자면 당연히 휴식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물론 코앞으로 다가온 데드라인의 힘으로 갑자기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치솟아서 벼락치기를 해내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필살기를 쓴 거죠. 하지만 내가 원할 때 쓸 수 없는 필살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말 중요한 일에서 필살기가 발휘되지 않으면 어떡해요? 앞으로 닥쳐올 모든 일을 이런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요? 


살다보면 당연히 벼락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요. 하지만 벼락치기의 비율이 너무 높으면 문제가 됩니다.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내기도 어렵고, 데드라인을 어길 가능성도 따라서 높아져요. 그러면 주변의 신뢰가 깨집니다. 주변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스로를 믿지 못하며 사는 건 정말 힘든 일이예요. 무엇보다도 무수한 기회를 눈앞에서, 그것도 나 때문에 날려보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미워지는데....요. 오늘 할 얘기는 다 했는데 이런 말로 글이 길어졌네요. 여기서 끝맺겠습니다. 전 세계의 미루기러들에게 오늘도 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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