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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Apr 28. 2023

일을 미룰 때 바로 써먹는 치트키 (끝)

마법의 주문




드디어 '일을 미룰 때 바로 써먹는 치트키' 글의 마지막 편입니다.(박수 짝짝)

마지막 글에서는 제 마법의 주문을 소개하겠습니다. 다음의 세 문장이에요.



1. 쬐끔만 하자
2. 대충이라도 하자
3. 엉망진창으로 하자




사실 마법의 주문은 아니고요...


허세를 부려볼래도 다섯 줄을 못 넘기겠네요. 하지만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꽤 도움이 되는 문장들이긴 합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미룰 때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자동 사고'를 저 문장들로 교체합니다. 이렇게 얻은 추진력으로(?) 실제로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결과를 얻습니다. 이 결과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부정적인 자동 사고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미루기라는 '행동 패턴'을 비트는 거죠.


자동적 사고란 어떤 일을 접했을 때 자동으로 떠오르는 생각이에요. 마치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친 뒤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 생각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알아차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미루기의 원인 중 불안이라던가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는 얘기는 전에도 했었죠. 그런데 이 감정들이 자동 사고에서 비롯됩니다. 이 자동 사고와 감정은 삽시간에 지나간 뒤 '딴짓'이라는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신이 왜 미루는지를 아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미룬다'는 건 알아차리기 쉽지만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길래' 미루는지는 알기가 어려워요. 이건 다른 사람이나 책이 아무리 원인을 밖에서 말해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면 일단 빛의 속도로 머릿속을 스치는데다가, 그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굉장히 논리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고(1번 숙제), 알아차린 뒤에는 반드시 말이나 글로 표현해서 실체를 줘야 합니다.(2번 숙제) 실체를 갖춰 줘야만 비로소 그 자동적 사고의 오류와 허점을 찾아서 고칠 수 있어요.(3번 숙제ㅋㅋ)


이를테면 저의 자동적 사고에는 '나는 능력이 없어(그리고 이 사실을 남이 알면 실망하고 떠날 거야)', '나는 실패해서는 안 돼', '나는 잘 해야만 해. 왜냐면 잘 해야만 하니까' 등등이 있습니다. 저를 모르는 분들이 보더라도 "님은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싶으실 거예요. 하지만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과 이런저런 요인들 때문에 제 머릿속에서는 굉장히 논리적인 문장들이었답니다. 저 생각이 머리에 머무르는 시간은 0.0000001초밖에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반면 저 생각이 유발한 불쾌한 감정, 도망가고픈 마음은 오래도록 남아서 일을 미루게 만들어요.

   

고로 제가 마법의 주문이라며 적은 세 문장은, 저 자동적 사고에 대항해서 펼치는 나름의 반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쬐끔만 하자


"쬐끔만 하자". 이 주문은 '내일 하자', '이따가 하자', '정각이 되면 하자', '이것만 하고 하자'라는 생각에 대항합니다. 내일 하자는 말을 뒤집으면 오늘은 안 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내일이 되면 '내일 하자'를 또 반복하게 될 거고요. '정각이 되면 하자'는 어떤가요? 진짜 정각이 되면 다음 정각에 하자고 다시 미루게 돼요. 언제까지? 데드라인이 코 앞에 닥칠 때까지요. 


저는 이 말을 "쬐끔만 하고 놀자"로 변주해서 쓰기도 합니다. 이 말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이 말은 일하기 싫은 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쬐끔만 하면 놀게 해준다잖아요. 하지만 중요한 일에 손을 대게 해 주기도 하는 주문이라서 좋아합니다. 저는 한술 더 떠서 3분짜리 모래시계를 뒤집거나 핸드폰 시계로 타이머를 맞춥니다. 정말 '쬐끔'만 하려고요.





대충이라도 하자


이 주문은 '지금 시작하면 최고의 퀄리티로 완성까지 해야만 해', '나는 잘 해내야만 해'라는 생각에 대항합니다. 저의 완벽주의를 다루는 데 정말 효과적이었는데요, 저는 이 말이 먹히는 걸 체감하고서야 저에게 완벽주의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기준을 '대충'으로 낮추니까 일이 손에 잡히더라고요. 현재는 백지인데 여기서 곧장 '완성(완벽)'을 상상하니까 일에 착수할 엄두가 안 났던 거였어요. 


이 주문을 사용해서 정말 일을 대충 하게 되자, 데드라인 한참 전에 러프하게 '완성'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 번 다시 보면서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어요.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 진행 상황을 공유하기도 수월해졌고요. 미루기를 다루기 위해 참 많은 방법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이 주문으로 인한 변화가 주변의 신뢰를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애자일 방법론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아참, 공부를 할 땐 '대충 읽어나 보자'를 씁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지간에 문제집이나 참고서가 있잖아요. 오늘치 분량을 소설책 읽듯이 읽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엉망진창으로 하자 


'대충이라도 하자'와 비슷합니다만, 이 주문은 좀 더 적극적입니다. 지금부터 아예 괴발개발로 하겠다!는 선언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면 일을 시작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재밌기까지 하더라고요. 기획서를 써야 한다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말이나 쓰고, 폰트를 전부 굴림체로 설정해서 글을 얹어 보기도 하고, 펜툴로 아무 모양이나 직직 긋기도 해요. 


그러고서야 깨달았어요. 이게 진짜 '스케치'구나! 물론 어떤 일에든 스케치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스케치마저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부담스러웠나 봐요. 그냥 엉망으로 해버리자고 스스로를 놓아줬더니 일을 척척 시작하더라고요. '대충 시작하면, 이 다음에는??'이라는 생각도 일부러 내려놓습니다. 괴발괴발 그렸는데 별로면 안 써도 되니까요. 


아이러니한 일이죠. 미루는 습관을 다룰 때는 정신 차리라고 자신을 다그치는 것보다 편하게 방목하는 게 더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지금까지 적은 방법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면서 미루는 습관을 다루고 있습니다. 업무 같은 중요한 일을 미룰 때는 플래너를 쓰면서 일을 구체화시키고, 스쿼트를 하고, 10초 정도 노려보다가 마법의 주문을 외워요. 설거지를 미룰 땐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춘 다음 설거지 더미를 지긋이 바라봅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미루는 습관을 잘 다루게 되었다고 자부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새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미루는 사람이라는 속성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미루기는 내가 가진 심리적 문제들이 엉겨붙어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완벽주의와 자기비하가 담긴 자동적 사고도, 불편한 감정에서 무작정 도망치고픈 마음도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평생 이런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이런 사람이란 걸 진정으로 알게 됐습니다. 왜 이따위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냐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이 못남을 묻어 숨기려던 시도는 그만뒀습니다. 자동사고가 그대로여도 어쩔 수 없죠. 다만 반박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조금씩 다르게 행동하면 됩니다.


저는 어떤 일을 미뤄서 불이익을 얻거나 파국을 만드는 데에 익숙했어요. 당연히 안 좋은 행동 패턴이지만 이 외의 삶이 어떤지는 몰랐어요. 그런 삶을 안 살아 봤으니까요. 하지만 행동이 조금씩이나마 바뀌기 시작하자 일의 결과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노력했다'는 것 자체로 제 자동 사고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실패할 수도 있어. 잘 못할 수도 있어.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도 있어. 하지만, 이 일을 하기로 선택할 수는 있어. 결과가 어떻든 이 일을 해낼 수 있어.'


지금의 저는 더 성실한 사람이 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딱 지금처럼, 무언가를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요. 뭔가를 미루다가도 어렵게나마 꾸역꾸역 할 일을 시작하는 사람 정도면 만족해요. 이 정도면 괜찮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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