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커피머신이라면
커피머신은 예열을 해야 커피를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커피머신이라고 상상해볼까요. 보통 커피머신은 예열 시간이 30초 정도면 됩니다. 그런데 ADHD가 있으면 이 예열 시간이 보통 수준보다 훨씬, 극단적으로 깁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예열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도가 너무 천천히 올라가는 탓에, 밖에서는 이 모습이 '꾸물거림', 혹은 '미루기'로 보이게 되죠. 이 모습은 어릴 때부터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아침밥을 안 먹고, 학교에 가야 하는데 옷을 안 갈아입고, 미적거리고, 양육자는 속이 터지고. 저는 어릴 때부터 예열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답니다.
보통은 "이 일은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야"라는 생각으로 100% 예열이 됩니다. 또는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이러저러한 불이익이 있을 거야. 무서워!"라는 불안으로도 가능하죠.(대개는 불안을 느끼면 그걸 해결하려고 일을 해치워 버리는데, 미루는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면 일을 회피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아무리 해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10% 정도밖에 예열이 되지 않는 탓에 커피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남은 90%의 예열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또, 예열 시간을 단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금 이야기한 '예열'은 동기나 에너지로 바꿔 읽어도 됩니다. ADHD는 언제나 동기가 부족합니다. 부족한 동기는 일을 미루게 만들기도 하지만, 시작한 일을 완수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해요. 끝내지 못한 일들이 늘 널부러져 있는 상황... 캡슐만 백만 개 뜯겨 있고 정작 한 잔의 커피도 내리지 못하는 커피머신, 그게 바로 접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아무튼 오늘 소개할 방법은 '10초 눈싸움'과 마찬가지로 간단합니다. 저는 일을 미루고 있을 때, 그냥 몸을 움직입니다. 어떤 것들을 하는지 나열하면 다음과 같아요.
스쿼트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후) 흥겨운 노래를 들으면서 둠칫거리기
피젯 큐브 하염없이 만지기
낙서
종이접기
눈을 감고 좋아하는 음악을 집중해서 끝까지 듣기
5분 정도 짧은 산책을 하기
제자리 뛰기
어떤 일의 중요도, 긴급도, 불안으로 다 채우지 못한 예열을 '움직임'으로 채우는 거예요. 만약 하고자 하는 일이 우리에게 몹시 흥미로운 일이고,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라면? 우리는 1초만에 예열을 끝내는 슈퍼 커피머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일은 그렇지가 않죠.
몸을 움직이는 건 일과 관련이 전혀 없는 행동인데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동기 부여가 될까요? 일단 제게는 효과가 있어요. 몸을 움직이고 나서 다시 자리에 앉으면 이전 글에서 쓴 '10초 눈싸움'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됩니다. 10분 전에는 왜 이 일을 못 했는지 이해가 안 되기도 해요. 왜 효과가 있는지는 ADHD의 스티밍(stimming, 자기 자극 행동)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고, 도파민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경험이라 과학적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길게 적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일을 미루고 계신가요? 속는 셈 치고 당장 스쿼트 30개나 제자리 뛰기 20번만 해보시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