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 숨기기
제목을 좀 자극적으로 써 봤습니다. 제가 쓰는 글이 여기에 걸맞은 팁이어야 할 텐데 걱정은 되네요... 아무튼 이전 글에서는 오늘 하루의 계획도 세웠고, 플래너도 썼습니다. 멋지게 해냈죠. 이제 일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그것은... 실행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계획이 한두 줄짜리 간단한 투두리스트라도, 실행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열심히 플래너를 썼는데도 일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 심정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증상을 다른 말로는 '미루기'라고 부릅니다.(ADHD 쪽 언어로는 실행기능 결함이라고 합니다.) 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그거요. 뇌과학과 심리 분야에서는 이 미루기를 오랫동안 연구했어요. 미루기는 의외로 게으른 천성(?)이나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에요. 부정적인 감정과 그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미루기를 유발하는 원인을 나열해 보면 불안, 우울, 낮은 자존감, 완벽주의, ADHD가 있어요. 이중 하나만 있어도 일을 미루게 되지만 모든 원인이 다 섞여 있기도 합니다.(그게 바로 저예요)
저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서부터 업무, 인간관계, 취미 등... 인간의 삶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을 미루며 살아왔습니다. 이걸 고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원인이 하나가 아니다보니 써야 하는 방법도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ADHD 약도 일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됐고, 뜻밖에 불안 약도 미루기를 완화해 주고 있지만 미루기를 관리하려면 기술이 더 필요합니다.
브런치에 글을 써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것도 사실은 미루기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어요. 그래서 오늘부터는 어떤 일을 미룰 때 제가 바로 사용하는 방법들을 적으려고 해요. 첫 계단이 너무 높으니까 발판을 하나씩 쌓는 거죠. 때로는 하나의 발판만으로도 일을 시작할 수 있지만 가진 방법을 모조리 동원해야 할 때도 있어요. 저는 솔직히 발판을 여러 개 쌓아도 일을 시작할까 말까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시작에 가까워진다는 게 중요하겠죠! 이전 글에서 플래너를 썼으니까, 이번 글에서는 플래너와 관련해서 제가 쓰는 방법을 말씀드릴게요.
미루기 치트키 1
열심히 쓴 플래너를 숨기라니까 말이 안 되는 것 같죠. 하지만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게 더 문제입니다. 숨길 겁니다.
'미루지 않으려면 일을 작게 쪼개라'는 조언을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일을 쪼개는 꼼수는 나중에 더 적을 생각이지만, 일단은 미루고 있는 일 하나를 골라서 더욱 잘게 쪼갭니다. '견적서 쓰기'라는 일이 있다고 해 볼게요. 그럼 이걸 '예전 견적서 확인하기', '엑셀 열기', '숫자 한 칸 채우기' 등등으로 세분화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눕니다.
머리속으로만 일을 쪼개는 게 아니라 실제로 어딘가에 적어야 합니다. 이때만큼은 앱 같은 디지털 툴보다 손으로 적는 게 효과적이었어요. 플래너의 빈 공간에 적어도 되고, 포스트잇이나 메모지, 이면지에 적기도 해요. 이걸로 뇌한테 사기 칠 거거든요. 이렇게 일을 쪼갰다면, 처음 할 일만 뺀 나머지 일들을 안 보이게 가려버립니다. 포스트잇에 포스트잇을 하나 더 겹쳐서 가리기도 하고, 다른 이면지로 가리기도 해요.
눈에 보이는 '처음 할 일'을 하는 데만 집중합니다. 그 일 말고 나머지는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일을 잘게 쪼갰는데도 그 일을 시작하기 어려운 건 제가 그 나머지 부분에 압도되기 때문입니다. 시작하는 행동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저 자신은 그 일 다음에 더 큰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그래서 일을 쪼갰는데도 시작할 수 없는 거예요. 압도감이 그대로니까요. 이제부터는 머릿속에서도 첫 단계 일만 생각합니다. 의도적으로 나머지 일은 잊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 아까 적어서 가린 리스트가 도움을 줘요.
이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잘 까먹는 ADHD의 특성을 반대로 이용한 거예요. 물론 ADHD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런 면은 있어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가기 쉽죠. 그리고 투두리스트를 가득 적을수록 그 목록에 질려서 일을 못한 경험은 누구나 있잖아요. 그 압도감을 줄이는 꼼수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하는 데 성공했다면 얼마간은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흐름이 끊겼을 때 아까 가려두었던 나머지 단계를 봅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제가 일을 나눴던 목록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더라고요. 그러면 다시 시작할 때는 남은 일을 새롭게 쪼갭니다. 그렇게 압도감을 느낄 때마다 반복합니다. 처음에는 이 귀찮은 짓을 자주 해야 하지만, 점점 텀이 길어져요.
물론, 이 방법을 쓰실 땐 '시작만 하면 나머지는 쉽게 할 수 있어'같은 말도 잊어버리세요. 우리 뇌는 '시작'이 아니라 '나머지'에 꽂혀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할 테니까요. '시작'에만 집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