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담길 매거진의 제목은 '터널에서 만난 데이지'이다. 데이지만큼 소박한 꽃이 또 있을까? 데이지는 흔해서 아프리칸 데이지, 코리안 데이지, 잉글리시 데이지 등 지구 곳곳에서 비슷한 모양새로 다소곳이 앉아있다. 이 아이들은 생긴 모양 대로 햇빛을 좋아한다. 그런데 터널 속에 데이지라니...
터널의 끝은 빛인데 아무리 걸어도 빛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아 울었다. 목 놓아 울다가 다시 일어서려 땅을 짚는데 뭔가 여린 생명이 만져진다. 내려다보니 데이지, 빛을 담은 데이지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거기서 자랐을 리 없는 녀석,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하다. 천연덕스럽게 내 손에 앉아 그렇게 찾아 헤매던 빛을 보여준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내 척박한 터널을 비춰주기 시작한 데이지가 눈물 바람을 하는 날마다 나타나 나를 위로해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가끔 나타나는 데이지 덕에 10년 가까운 세월을 터널 속에서 버티고 있다.
누군가 위로랍시고 '고난이 축복이야'라고 말하면 귀싸대기를 후려갈기고 싶을 만큼 나는 화가 나있었다. 아버님이 하시던 사업을 접어야 했는데 살리겠다고 무모하게 뛰어들어 우리 집까지 날리신 시어머니, 끝까지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처분 타이밍을 놓쳐 모든 재산을 경매에 넘어가게 하신 고집스러운 시어머니, 이 모든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너무나 당당하신 대단한 시어머니, 나와 상의도 않고 어머니께 신용대출을 해드린 남편에게 화가 났다. 디테일은 매우 지루하고 복잡하고 지난하다. 그렇게 시작된 터널 생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몇 년간은 원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원망의 손가락은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향했다. 기도하겠다고 앉았지만 늘 항의에 가까웠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큰일이 벌어진 것은 벌어진 것이고 나는 세 아이를 키워야 했고 남편은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다. 상하이에서 돌아오며 우리 집으로 들어갈 수 없어 시댁에서 생활했다. 시댁이 넓었지만 우리 다섯 식구가 사용할 수 있는 방은 2개뿐. 상하이에서 짐이 도착하던 날 난 나에게 좀 놀랐다. 짐을 많이 버렸고 옷가지와 책만 집으로 올리고 나머지는 창고로 보냈다. 이런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씩씩하게 일처리를 하고 정리하는 내가 '엄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우리는 빚을 갚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공부시키고 굶지 않고 살고 있다. 가끔은 '비교'라는 녀석이 내 심기를 건드리고 비아냥거릴 때도 있지만 맷집이 좋아져서 잘 견디고 있다. 맷집도 좋아졌지만 내겐 데이지가 있었다. 그걸 가져다 놓은 분을 원망하고 있었기에 처음에 난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은 매번 내 눈물이 떨어진 곳에 데이지를 놓고 가셨다. 그 수많은 데이지들이 나를 살렸다. 터널에서 나는 책선생이 되었고, 두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으며 막둥이는 내년에 고3이 된다. 남편은 안 잘리고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우리 가족은 끈끈하다.
나는 터널이라는 단어를 늘 부정적 의미로 사용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남편과 차를 타고 가다가 터널을 지나는데 갑자기 '터널은 숏컷이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저 험난한 등산길 대신 터널을 지나는 건 감사할 일이 아닌가! 감사할 일이라 여기니 감사할 일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