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재채기와 팝콘, 그리고 남 생각

by 김레비

나는 해외여행 경험이 정말 적은 편이다. 그렇다 보니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는 것도, 낯선 언어만이 들리는 땅에 오는 것도 정말 익숙지 않다. 혼자 생각정리를 위해 여행을 떠나 본 적이 많았다. 대부분 국내였고, 그 생각은 항상 여행지를 가는 도중에 끝나거나 길어도 하루면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끝나지 않는 회사 생활의 일 폭탄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감정, 그리고 원인 모를 신체 증상들의 괴롭힘까지. 이번 생각정리는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완료될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6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의 시차를 내 마음에게도 주다 보니 어느새 뭔가 흑화 되어 강해져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뭔가, 아름답게 강해지면 좋으련만은.. 약간은 냉정해지고, 좋게는 두꺼워지고 있다. 역시나 나를 위한 여행에서 가장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은 '가는 길'이다.



엣치!


남 얘기 오랜만에 해보자면, 오는 비행기에서 한 남자 승객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끊임없는 재채기 덕에 남 생각일기의 주제가 바로 떠 올랐다. 저 사람이 남 신경을 쓰는가 안 쓰는가는 재채기에서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예전에 길을 가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횡단보도에서 한 커플이 서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있었는데, 남자가 자기 딴에는 여자를 위해 고개를 돌리고 공중에 재채기를 했다. 말 그대로 공중 분사 그 자체였다. 입을 가리지도 가릴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다. 지난 글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라는 주제를 다뤘는데, 이런 모먼트가 바로 그 순간이다.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 하는 행동은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람 몸에 박힌 남에 대한 배려의 습관과 제삼자에 대한 그 마음은 절대로 바뀔 수 없는 버릇이자 천성이다.


비행기에서의 그는 시종일관 입을 막지 않고 재채기를 해댔다. 그가 재채기를 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순간을 눈치챌 남생각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와 가까운 친구에게는 나도 스스럼없이 얘기하지만, 쌩판 모르는 사람에게 입을 가려주세요! 할 만큼 깡다구가 좋진 못하기에 그저 상황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재밌었던 것은, 그분 주위에 모든 사람은 조용히 마스크를 꺼내 들었다.


또 재채기와 관련해서 재밌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재채기를 엄청 특이하게 한다. 재채기 끝에 특이한 음정을 넣어서 "엣치이~잉~!'하고 끝을 올린다. 그 재채기는 어느 시공간에서든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내가 역대 본 재채기 중에 가장 특이했다. 그 사람에 대해서도 수도 없이 연구했다. '대체 왜 저런 재채기를 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사람과 이런저런 집단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은 결론적으로 순간의 남의 감정이나, 상황을 파악하는 공감의 능력이 굉장히 낮았다. 전체가 슬프고 눈치 보는 상황에서도 자신은 기쁘니 자신의 기쁨을 하염없이 표현하는 친구였다. 남생각력이 낮아서, 자신의 재채기가 귀엽고 주목받는 그 자체만 생각해도 좋은 것이다.


내 가까이에는 되게 재채기를 답답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엣!ㅊ' 하고 속으로 먹어 버린다. 누구든 주위에 그런 사람 한 명씩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밌게도 그 친구도 정말 극 ENFJ이자 나만큼(은 아니지만..^^) 남생각이 무지하게 많은 사람이다. 아 이쯤에서 내 재채기 스타일은 어떻냐고? 나는 되게 웃기게도 코로 재채기를 하는 편이다. 일단 침을 튀기는 것이 싫고, 코로 조용히 하다 보면 '엣~크흑' 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혼자 내 방에 있으면 세상 시원하게 재채기하는 것은 비밀이다.



와그작! 와그작!


재채기와 비슷하게 정말 이 이 사람의 남 생각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나랑 영화를 한 번이라도 봐 본 사람은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영화관에서의 팝콘 먹는 스타일이다. 최근에, 영화관에 가서 옆자리 어린 커플이 정말 내 인생 최고의 데시벨을 선보이며 팝콘을 와그작와그작 퍼 먹고 있었다. 심지어 내 옆에 있던 같이 간 사람도 한 자리를 건넜음에도 그 소리에 신경 쓸 정도였다. 나는 아직까지 "저기요, 죄송한데 조용히 씹어 주시겠어요?" 해본 적은 없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저 속도로 저렇게 와그작와그작 먹으면 10분이면 끝나겠다. 그리고 그날 그 커플을 보며 가장 절망했던 순간은 그 영화관의 가장 큰 팝콘통을 무려 둘이서 1인 1통씩을 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이다. 그날 영화의 초반부는 나에겐 아직도 와그작 2중주로 기억된다.


진짜 재밌는 상황이 있다. 나는 보통 긴박하고 웅장한 씬일 때 재빠르게 팝콘을 먹는다. 그때는 남 걱정 안 하고 시원하게 팝콘을 먹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와그작 소리가 나지는 않는다. 이게 왜 재밌는 상황이냐면, 어떤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웅장한 씬일 때는 씬에 집중하느라 팝콘을 잘 안 먹고 조용한 씬일 때는 시원하게 팝콘을 씹어 먹는다. 그때도 최근에 내가 좋아하는 아이맥스 영화를 관람하던 날이었는데, 영화보다 옆 자리 낯선 아저씨의 행태를 관찰하는 게 더 재밌었다.


그럼 뭐 녹여 먹으라고? 팝콘을 입에 아무리 한가득 넣어도 입술만 다물면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와그작 와그작은 입을 벌리고 씹으니 나는 소리이다. 적어도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남의 팝콘 소리 때문에 영화에 집중을 못해봤거나, 내 팝콘 소리가 참 크구나 생각을 해본 사람은 그런 불상사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남생각력이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금 멋진 나로 돌아가기 위해 떠나온 6시간의 타지에서. 한국보다 2시간이 느린 이곳에서 딱 2시간만 뒤에서 한국에서의 나를 돌아보고 있다.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은 깊은 밤 우리를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남을 위한 나를 충전하고 있는 이 시간이 우리에게 반드시 행복한 하루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서로들의 2시간이 한국에서 다시 맞춰질 때! 새로운 시선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든든한 나로 다시금 자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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