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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그리스도인

사랑을 행하지 않음도 죄다

by 하룻강아지

근래에 회사를 그만두느냐 마느냐로 마음의 갈등이 심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마치 간음을 조장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은 내 의견과 동일하게 내가 하는 일이 간음을 조장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네가 하는 일이 죄라면 세상에 죄가 아닌 게 무엇이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죄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걸 알았고

어떻게 주님이 또 좋은 책을 손에 넣게 해주셔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중략)...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얼핏 이 말씀을 보면 그럼 죄 안짓고는 못살겠네 아몰랑 지옥가지뭐 할수도 있고,

세상엔 죄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데 진지하고 싶다.

그러려면 죄의 정의를 좀 더 파고들어볼 필요가 있다.

힌트가 될 만한 구절이 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겠군.

사랑이란 애초에 능동적인 것이다. 귀찮은 것이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게 죄인 건 알겠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게 죄라고?

그리스도인한테는 그렇단다. 야고보서 4장 17절을 보자.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그렇다면 죄스러운(사랑을 행하기를 귀찮아하고 피곤해하는)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다.

"주님은(불신자라면 선생님은) 무엇을 근거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십니까?"



그 답은 주기도문에 있다.

주님이 직접 이렇게 기도하라고 알려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소서.

여기서의 죄는 아람어로 hoba인데, hoba는 '빚' 이라는 의미도 된다.

바꾸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없애(탕감)줍니다. 그러니 우리의 빚도 없애주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빚진 자다.

그 희생을 근거로 주님은 내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실 권한이 있다.



그럼 사랑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 지점에서 내 신앙생활이 침체에 빠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있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에 삶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첫째로 나는 내 일에 치여서 주변을 사랑할 기력이 없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갈아넣고 있었고, 그러면서 주변에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했다.

나는 화내고, 원한을 품었으며, 불의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고, 덮어주지 않았다.



둘째로 나는 이 시대의 수동성에 길들여져 있었다.

나 스스로도 연애에서 사랑을 더 실천하기를 귀찮아했기 때문이다.

여자친구와 갈등이 있었는데 요지는 '좀더 사랑을 느끼게 해달라' 는 것이었다.

내 마음 아주 깊은 곳에는, '시간 쓰고 돈 쓰는데 뭘 더 그런 걸 하냐.' 는 생각이 있었다.

'남자가 돈 벌어오면 됐지 뭘 더 신경쓰라고 하냐 나도 힘들다' 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사회로부터 영향받는 개인임을 생각해보면,

우리 시대에 연애나 결혼이 줄어든 것은 귀찮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인에게 서로 돈을 쓰고 시간을 보내면서, 거기다 추가로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정서적 행위들을 추가로 하기가 귀찮은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야되나. 라는 생각이 있는 거지.

그돈으로 혼자 살면 잘 사는데 뭐하러 연애나 결혼을 하나. 라는 거다. 나도 그런 생각이 있었고.

이성간의 사랑이 가장 본능적이라는 걸 생각해볼 때, 얼마나 사랑이 없는 시대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도 죄다. 라는 걸 생각해보면,

나라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랑을 행해서 돌아오는 비용과 상처를 대가로 지불하고서라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머리속에 사랑과 가까운 행동이 떠올랐다면 뭘 그렇게까지 해. 라고 생각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그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내 마음에 더 넘칠 것이다.



이 지점에서 회사를 그만두는 문제로 돌아가보자.

내가 세상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웃사랑은 무엇일까.

주님을 더 많이 전하는 것이겠지. 그러려면 나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더 확보해야 한다. 오늘 글도 연차써서 컨디션이 좀 괜찮아서 쓰는거니까.

하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둠으로써 회사에 공백상태가 일어나고 남은 동료들이 힘들어지는 것 또한 이웃사랑이 아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과, 회사에 일어날 단기적 쇼크가 긴장관계인거지.



이 지점을 해소하려면, 회사에 최대한 공백상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간을 두고 동료들과 논의하고 조치해야겠다.

그러면서 내가 좀더 주님의 일을 붙잡을 수 있도록 천천히 손을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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