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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룻강아지 Jun 28. 2024

교회를 다니는데 욕망이 들끓는다면

고등학생 때였다. 난 제법 공부를 했었기에 애들이 나한테 이렇게 물어보는걸 20번은 더 들었다.

"OO아, 공부 하기싫으면 어떻게 해?"

내 대답은 항상 한결같았다.

"하지마."



저 질문에 담긴 의미는, 공부는 하기 싫은데, 학교에는 있어야되니, 

대체 난 어떻게 해야되냐는 물음이었던 것 같다.



교회를 다니는데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주님은 믿었는데, 주님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대로 살기는 싫은거다.

이건 아주 피할수없고 중요한 문제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면 행함으로 나온다고 성경은 얘기하니까.



주님은 이렇게 얘기하셨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도 주님을 믿자마자 그분이 좋아하시는 삶의 방식이,

내 기존의 삶의 방식과 충돌하는 것 때문에 고민을 했었는데,

당시 내 기도일기에 이렇게 적어놨다.



"돈이, 여자가, 권력이 더 좋은 길 같아 보이는데 대체 왜 지는 길로 가라고 하시는거예요?"

"지면 뭐가 남는데요? 무시밖에 더 받아요?"



신앙의 년수가 오래돼서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분들도 아마 처음엔 다 이런 고민을 했을것이다.

주님이 븅1신같이 살고있는 나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내 뒤통수를 치셔서 끌고와 교회에 앉히신걸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물론 뒤통수 때리신게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안으신건데^.^)



문제는 그 구원받은 다음이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죽기 5분 전에 믿을걸"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세상의 세계관과, 주님이 주신 세계관이 충돌하기 때문이며,

기존에 갖고 있던 죄를 저지르는 삶의 경향성을 바로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나 여성분들은 공감을 못할 수 있으나

주님을 믿기 직전에 진짜 내 취향인 얃1옹배우를 발견했는데,

주님을 믿고 3개월이 지나 그 배우의 신작이 나오면 그걸 봐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나같은 경우는 이런 일이 있었다.

마케팅 일을 하는데 예전에 프로젝트를 했던 명상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다시 일을 맡아줄수 있겠느냐는 의뢰였다.

제법 쉬운 일만 처리하면 3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명상센터는 영성을 다루지만 주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하고 목사님한테 의견을 여쭤본뒤 일을 거절했다.

대신 주님한테 감정적으로 생색내는걸 잊지않았다. 감정적으로 생색냈다는건,

주님 보셨죠 제가 주님을위해서 300만원도 포기할수있습니다 엣헴 이런거였는데,

아마 귀엽게 봐주셨을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믿었지만, '낡은 삶의 방식'...그러니까 예전에 살던대로 살고싶다는 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이걸 우리 갓-주님은 이미 지적하셨는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하...맞워요...그치만 살던대로 살고싶은때가 너무 많은데요...?

그럴때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2가지 있는 것 같다.



1. 일단 주님이 하라는대로 해본다(추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며칠 뒤에 같이 일하는 사람과 트러블이 나서,

나는 쒸익쒸익거리면서 이제 때려쳐 ㅅㅂ 이제 너 안봐 하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괴로운 마음으로 집에가서 성경을 읽어보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데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게 아니라고 하신다.

아니...어떻게 이 상황에 억떡계 사랑하라는거예요 대체...하지만 저도 주님을 사랑하긴하는데...

그날밤 아주 많은 고민을 했는데, 그 트러블은 단지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돈이 얽힌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님이 화목하랬으니까 제가 화목할게요 뒷감당은 주님이 해주세요. 하고

다음날 내가 뜻을 접겠다고 했다.

글로 쓰니 깔끔하지만 사실 에버랜드 롤러코스터타는것같은 감정이 왔다갔다했다.



근데 이렇게 '지는' 의사결정을 하고 나니 이겼을때보다 더 후련하고 결과도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여태까지 몇번 해보니 주님이 가라는 길은 손해보는 길만은 아니었다.

왜 손해보는게 아니냐면, 반드시 물질적 이득을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선택을 했을때 뭔가 나를 예뻐해주시는 주님의 손길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장하다 내새끼 우쭈쭈 같은...그런 손길말이지.

헤으응...



2. 도대체 하기싫다

다 알겠는데 주님이 하라는대로 도대체 하기싫다하면 일단,



2-1. 아주 작은것부터 해본다

일단 서로 사랑하라고 했으니 하루에 한번만 진짜 딱한번만 남한테 웃어본다.

서로 기도해주라고 했으니 평소같았으면 죽이고 싶었을 사람을 위해 기도해본다.

물론 억지로 하는거다. 이를 갈면서 억지로라도 해본다.

머리로는 죽인다를 외치지만 입으로는 사랑의 기도를 한다.

그럼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데, 둘이 섞여서 나온다.



"저 개새...형제를 하는일마다 복을 주시고...

뒷골목에 가다 넘어져서 깨진 유리를 밟...았는데 돈을 줍게 해주시고..."



이건 비성경적인게 아니다.

성경이 내세우는 사랑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오래 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면 왜 주님이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지 조금씩 알게되는것같다.



2-2. 하지마 그럼

만약 주님이 제시한길이 내가볼때 진짜 영 별로다 싶으면, 걍 내가 살고싶은대로 산다.



"지금 지옥가는 길을 권하는거임?"



지옥가는길을 권하는게 아니라, 그게 허무하다는걸 느낄때까지 해보자는거다.

예를들어 남자들이 환상을 갖고 있는, 많은 여자와의 관계가 있다면, 닥치는대로 많이 해보는거다.

기회 있는 때마다 하기로 힘써보는거다. 길에서 번호도 물어보고. 처음엔 아주 좋을것이다.

그런데 하면할수록 허무해진다.

사람들은 많은 섹스에 행복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이게 행복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돈을 벌고 싶다면, 돈에 미쳐서 벌어본다.

그러면 정말 많이 벌었든 어느정도 벌었든 사람들이 돈많으면 행복하다는데

정말 이게 행복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럼 그때 인정하면 된다. '아. 이게 삶의 수준을 높여줄 수 있지만 허무를 해결해줄 수는 없구나.'

하지만 좀 인정이 덜되면, 더 해본다. 더 가도 괜찮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보는게,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서 주님때문에

내가 하고싶은거 못한다고 불경스럽게 불평하는것보다 훨씬 낫다.

정말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내가 살고싶은대로 살 용기와 실력이 없고,

그걸 키우는것조차 자신이 없어서 주님탓을 하는건지,

내가 진짜 그렇게 살수있는데 주님이 하지말라고 하셔서 안 그렇게 사는(척하는)건지 답이 나온다.  



정말 낡은 부대가(낡은 삶의 방식이) 좋고 미련이 많으면 집 나가서 끝까지 가본다.

그리고 끝까지 가서 성공하던지 파산하던지 해보는거다.

하지만 무조건 그 끝엔 영적인 파산이 있겠지. 인간의 허무는 메꿀 수 없는 것이니.



하지만 주님은 그 모든 과정을 허용하시고 기다려주신다.

왜냐면 주님은 그냥 믿으라고 했으니까 믿으라고, 까라면 까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고,

그분이 신이심에도(!) 우리를 인생 전체에 걸쳐 설득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형한테 사기친 야곱을 기다리셨고, 모세를 40년동안 기다리셨으며,

기독교인을 돌로 쳐죽인(걸 방관하거나 같이한) 바울을 기다려주신 분이다.

그분의 용서와 긍휼을 값싸게 여기라는게 아니라, 정말 미련이 남는다면 가보는거다.



정중하게 주님께 잠깐 집좀 나갔다오겠습니다.

제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는 길보단 돈이 많은 길이 낫습니다.

저와 주님은 코뉴어앵무새와 일론머스크보다 더한 격차가 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나갔다오면 된다.



주님의 용서의 폭은 좁지 않다. 그분의 용서의 폭은 십자가니까.

십자가는 신인 나를 니들이 죽여도 내가 거기까지도 용서하겠다는 거니까.

그리고 집을 나갔다오면 언젠가, 몇십년뒤에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기독교인을 신나게 돌로 쳐죽였던(혹은 방관한)

바울이 고백했던 대로 이제는 진심으로 이렇게 고백하게 될 수 있겠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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