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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unny Rain Sep 17. 2021

출판 편집자를 괴롭히는 방법-9

"내가 갑이라니, 좋네요!"

"평생 계약할 때 을이었는데 출판 계약할 때는 내가 갑이라니, 좋네요. 하하"


방송계에서 일하는 분과 출판 계약서에 도장 찍을 때다.

방송 쪽에서는 항상 을로 계약했는데 출판 쪽에서는 자신이 갑이라니 신기하다며,

싱글벙글.

그런데 그분... 계약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원고를 절반도 완성하지 못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다른 출판사는 1년이고 2년이고 원고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준다던데, 거기는 왜 그래요?"


원고 좀 서둘러달라고 하니 이렇게 말한다.

을이 갑이 되더니 슈퍼갑 행세를 한달까.

올해 출간 일정에 잡아놓았는데, 참으로 곤란하다.

원고를 받겠다고 한 시일은 이미 지났다.

책만 나오면 좀 반응이 있을 것 같은데, 라고 해도 원고가 나오지 않으니 헛소리일 뿐이다.


당연히 회사에서 엄청난 압박을 받는다.

큰 회사들은 시스템이 잘 갖춰져서 한 책의 출간 일정이 늦어진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작은 출판사는 책 하나하나 일정에 맞게 서둘러 출간해야 한다.

안 그러면 매출에 큰 타격을 받는다.

게다가 일정까지 잡아놓았는데 구멍이 나니, 내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렇다고 편집자가 할 일이 없는 게 아닌데, 책이 안 나온다고 난리도 아니다.

글 못 쓰는 국내 저자의 원고를 열심히 수정하고 살을 붙이는 중인데도, 이해는 없다.

결과만 생각할 뿐.


결국, 마지막이랄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을 쓴다.

'계약 해지'

그렇다고 해도 계약 해지를 정말 하겠다는 의지는 아니다.

또, 바로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회사에서 저 단어를 언급한 사실을 안 밝힐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저자를 압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회사를 변명 삼아 저 찝찝한 단어 조합을 꺼내놓아 본다.

저 단어 조합의 위압감은 매우 크다.

아무리 갑이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다리가 풀리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사실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다.

그렇게 해서 원고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으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제대로 원고가 나올지도 걱정되고.


갑이 되었다고 갑질 해도 되는 건 아니다.

갑이 되었다고 일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을이었기 때문에 잘 알면서도, 갑이 된 기분을 즐기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을로서의 일을 우선순위로 두고 진행하는 것일 게다.

욕 먹지 않으려고...

사실 동시 진행해야 하는데, 그런 피곤함은 계획에 두고 싶지 않겠지.

이해는 한다.

그저 모든 걸 먼저 책임감 있게 해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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