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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과의 첫 대화

시니컬한 그와 질척대던 나

by 방구석의 이자카야


“안녕? 나 기억나니?”


떨리는 손으로 보낸 메시지.

내 머릿속에는 그가 이걸 보고 기뻐하며 “와, 네가 여기서 왜 나와?!” 하고 반가워할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답장은 아주 간결하고 심플했다.

“ㅇㅇ.”


뭐라고? ㅇㅇ? 겨우 두 글자?

나는 그의 메시지를 몇 초 동안 쳐다보며, 아니 뭔가 더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다.

“근데 너 누구더라?” 정도는 적어줄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애써 밝게 다시 물었다.


“내가 누군지 기억나?”


그는 몇 분 후 이렇게 답했다.


“음... 잘 모르겠어. 근데 시끄러웠던 거 같긴 해.”


시끄러웠던 거 같긴 해?

이게 지금 최선입니까? 내 심장은 이 답장을 읽는 순간 그대로 내려앉았다.

나는 그와 나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가 분명 나를 기억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그냥... 시끄러운 소음이었다.




그래도 기죽지 않으려고, 애써 농담으로 넘기려 했다.


“헐, 시끄러운 것밖에 기억 안 나? 나는 너 초중고 전설인 거 아직도 다 기억나는데!”


그의 답은 더 시니컬했다.


“아, 뭐 그런 얘기도 있었지. 근데 난 몰랐어. 그냥 다들 나한테 관심이 많았던 거 같긴 한데.”


그냥 관심이 많았던 거 같긴 한데.


아니, 대체 이 태도는 뭐지? 마치 “내가 신경 쓸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를 기억 속에서 전설로 만들고 흠모하며 살아왔던 시간이

어쩌면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간 삐쳐서 나는 돌직구를 날렸다.


“그럼 나 기억 못 하는 거야? 진짜로?”


그는 아주 냉정하게 답했다.


“시끄러웠던 건 기억나는데. 근데 솔직히 딱히 친했던 건 아닌 거 같아.”


... 내 마음은 와장창.

하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웃음이 났다. 이 얼마나 담백하고 냉정한 대답인가.

내가 그를 기억 속에 미화하고,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그의 옆자리로 포장해 왔던 내 노력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상했다.

그의 시니컬한 답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대화를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어쩌면 그 시니컬함이, 그의 무심함이, 내가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를 특별히 여겼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기억에 남긴 했네. 시끄럽게라도.”


나는 그렇게 농담을 던지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그저 짧게 답했다.


“응. 시끄럽게.”





... 알겠다. 시작이 이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그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부터 내 자존감을 산산조각 내며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니컬한 태도에 오기가 생겼다.


“그래도 시끄러운 건 기억에 남잖아? 덕분에 내가 초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네 옆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거네.”


나는 억지로 밝은 척하며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답은 또 한 번 내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음... 옆자리였어?”


뭐라고? 옆자리도 기억 못 한다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니, 옆자리를 기억 못 할 수가 있나?


나는 그 시절 그의 옆에서 ADHD 폭발하며 수업마다 선생님께 혼났던 순간들,

그가 내게 "조용히 해"라고 낮게 중얼댔던 장면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는 그런 나를 아예 잊어버린 거였다.


“헐! 진짜 몰라? 우리가 짝이었는데?”


내가 강력하게 항의하듯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결국 대답했다.


“아, 그랬나? 근데 너 되게 시끄러웠던 건 확실히 기억남.”


여기서 또 시끄럽다니.

그는 내 기억을 일부러 그렇게 요약하는 것 같았다.

나는 슬슬 그의 무신경함에 지쳐가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 시끄러운 건 인정. 근데 너도 솔직히 나한테 뭐라고 했었잖아. ‘조용히 좀 해’ 맨날 이랬잖아.”


내가 옛날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 맞아. 근데 넌 내가 그렇게 말해도 안 듣더라.”


웃음이 터졌다.

진짜 내가 안 들었던 건 맞다. 그는 한 번 말하면 조용히 끝냈고,

나는 그 말이 지나가자마자 다시 폭주를 시작했던 ADHD 아이였다.

그래도 그 대답에서 작은 뉘앙스의 친숙함이 느껴져서, 내 마음은 조금 풀렸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의외로 길어졌다.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나는 그가 얼마나 전설적인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기 시작했다.


“넌 진짜 초중고 내내 레전드였어. 사람들은 너 이름만 들어도 난리 났었잖아.”


그는 여전히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 잘 몰랐는데. 그냥 다들 오버한 거 같은데.”


오버? 아니, 그건 오버가 아니었는데.

나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그게 또 그의 매력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대화는 그 후로도 엉뚱하게 이어졌다.

내가 “너 축구할 때 상대팀 무너뜨리는 거 진짜 멋졌어”라고 하면,

그는 “그냥 뛰었을 뿐인데”라고 답했고,

내가 “너 진짜 잘생겼다는 소문이 진짜 장난 아니었어”라고 하면,

그는 “그냥 아빠 닮아서 그랬나 보지”라고 무덤덤하게 넘겼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이어진 대화 속에서, 나는 점점 그와 다시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시절 완벽했던 그, 냉정하고 멋있기만 했던 그가,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엔 어딘가 조금씩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대화 끝 무렵,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근데 너 진짜 기억 안 나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그런 척하는 거야?”


그는 잠시 조용하더니, 살짝 장난스러운 톤으로 대답했다.


“글쎄. 그냥 시끄러운 애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좀 달라 보이네.”





“근데 요즘은 어떻게 살아?”


그와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나는 문득 요즘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실 궁금증이 생긴 건 한참 전부터였지만,

괜히 물었다가 "별로야" 같은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올까 봐 망설였다.


그런데 어쩌다 용기를 내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특유의 무심한 톤으로 대답했다.


“그냥. 잘 살지 뭐.”


잘 산다고?

그건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뭔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졌고, 애써 농담 섞인 톤으로 다시 물었다.


“그냥? 진짜 ‘그냥’이야? 그럼 집에서 매일 누워서 TV나 보고 그런 거야?”


그러자 그는 툭 치듯 대답했다.


“TV는 잘 안 봐. 그냥 가끔 책 보거나...축구 좀 하고.”


“아, 역시 축구는 아직도 하네. 혹시 동네 아저씨들하고 풋살 하다가 골대 무너뜨리는 거 아니야?”


내 농담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들려온 그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낯설고 신기하던지, 나는 스스로 좀 감격스러워졌다.


“아니, 골대는 멀쩡해. 근데 네 말 듣고 보니 한 번 부숴볼까 싶네.”


“오, 역시 전설은 어디 안 가는구나. 운동장에서 아직도 다 씹어먹고 다니는 거지?”


“뭐. 그냥 공 좀 차는 정도지. 너는 요즘 뭐 하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나? 음...뭐랄까. 열심히 살았는데, 다시 보니 좀 이상하게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정신 차려보니 ‘이제 뭐 하지’ 싶은 그런 상황?”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는 듯한 뉘앙스로 답했다.


“너답네. 시끄럽게 살았을 것 같아.”


“야! 또 시끄럽다는 얘기야? 그건 초등학교 때 얘기고, 나 지금은 꽤 조용하게 살아.”


“그럼 지금 너 조용하게 살면서 뭐 하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조용하게, 하지만 화려하게!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인생 고민 들고, 하루하루 나만의 다큐멘터리 찍는 중이지.”


그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 다큐멘터리라니. 대사 없는 코미디일 거 같긴 하다.”


“어머, 나 진짜 상처받는다? 내가 얼마나 진지한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진지한 거 알지. 시끄럽고 진지한 사람.”


그의 농담에 나도 웃으며 대꾸했다.


“뭐, 인정. 근데 진지한 사람인 건 너도 마찬가지일걸?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뭔가 묵직하게 살아가는 거 같아.”


그는 한 박자 쉬고 대답했다.


“글쎄. 그냥, 어릴 때보단 덜 진지한 것 같긴 해.”


그 말에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도 어릴 적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여전히 멋지게 살고 있지?”

내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에 그는 짧게,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글쎄. 지금 너랑 대화 나누고 있는 게 꽤 괜찮은 거 같아.”


그 순간, 나는 이 대화가 단순한 과거의 재회가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대화가 이어지던 중, 그의 말 한마디가 불쑥 내 심장을 쿡 찔렀다.


“근데,” 그는 잠깐 멈칫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여자들이랑은 말이 이렇게 길게 안 이어지는데, 너랑 대화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순간 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동시에 온갖 상상이 다 떠올랐다.

‘다른 여자들과는 길게 안 한다고? 그럼 나랑은 왜?’

머릿속에서 질문이 200개쯤 쏟아지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오, 진짜? 그럼 나랑 대화가 그렇게 재밌어?”


그는 웃으며 답했다.


“재밌다기보단, 뭐랄까... 그냥 네가 예전이랑 똑같아서 그런 거 같아. 별생각 없이 대화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니까.”


‘예전이랑 똑같다’는 말에 슬며시 뒷목을 긁었다.

칭찬인지, 아니면 내가 여전히 시끄럽고 특이한 사람이라는 건지 헷갈렸다.

그래도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좋았다.


“그럼 내가 엄청 특별한 거네? 다른 여자들한테는 안 그러는데 나랑은 길게 얘기하고?”


그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





“그렇게 들릴 수도가 아니라, 확실히 그렇게 들려야지! 내가 너랑 얘기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알겠어, 알겠어. 근데 노력 안 해도 돼. 네가 말 걸면 그냥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잖아.”


이 말을 들으니 어쩐지 뿌듯하면서도 조금은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대화가 길어지는 게 그의 의도된 배려가 아니라, 나와의 대화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라니.


“근데,” 내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이렇게 오래 대화하다 보면 너 지루한 거 아니야? 괜히 예의 차린다거나.”


그는 단호히 말했다.


“지루하면 이렇게 오래 얘기 안 하지. 넌 뭐랄까... 대화하기가 편해.”


그 말에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대화가 편하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다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단서 같았다.

마치 우리가 예전부터 쌓아온 그 시절의 인연이 여전히 우리를 이어주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럼 앞으로도 자주 얘기해야겠다. 내가 너한테 시간을 뺏는 게 괜히 뿌듯하네.”


“뺏기는 게 아니라, 나도 즐기는 중이야.”


나는 잠시 전화기를 쥔 채 가만히 있었다.
그의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았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천천히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통화하자.”


그가 짧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다음에 또.”


나는 천천히 전화를 끊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그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손에 든 전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이미 그와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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