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2
몇 년 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마음이 힘들고 속상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스피커폰을 켜고
한 손엔 레드향, 한 손엔 행주를 든 채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무슨 일이야? 천천히 말해 봐."
친구는 한참 동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응, 그랬구나." "그래도 네가 정말 많이 노력했네."
이런 말들로 친구의 이야기를 차분히 받아주었다.
그때 옆에 있던 남편이
내가 닦아둔 과일을 바라보다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아, 과일 닦으러 와."
갑작스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친구는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물었고,
남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일을 닦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져.
과일이 반짝반짝 깨끗해지는 걸 보면
머릿속도, 마음속도 정리되는 것 같거든.
도랑 같은 거야.
닦다 보면 마음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에 친구는 심각하던 고민을 뒤로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와, 너희 남편 철학적이다.
과일 하나 닦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다니."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원래 그래.
대단한 얘기인 척하면서, 결국 과일 닦으라는 거야."
사실 내가 이렇게 과일을 닦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하는 여러 가지 일 중 하나가 바로 과일 판매다.
요즘은 제철이라 레드향과 한라봉을 선별하고,
닦고, 포장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 뒤로 친구와 나는 가끔 농담처럼
"오늘 과일 닦으면서 도도 닦고 있어!"
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친구는 힘들 때마다
늘 같은 말을 한다.
"야, 나 제주도에 과일 닦으러 갈래!"
그날 이후로
나에게 과일을 닦는 시간은
더 이상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남편의 말처럼,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고
작은 위로를 느끼는 순간이다.
작고 평범한 과일 하나가
이렇게 많은 의미를 담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도 나는 과일을 닦으며,
마음의 먼지를 하나씩 털어낸다.
역시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