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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 Jul 22. 2020

소설가에게 오리지널이란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학교 수업을 포함한 여러 매체를 통해 소설가가 가져야 할 태도, 좋은 소설의 특징, 소설 작법 등을 접해왔음에도, 내게 소설은 여전히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있다. 엄청난 재능을 물려받은 이야기꾼이 아니기에 소설을 쓰는 행위는 고역이었고 많은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다. 소설에 대한 개인적인 부담감은 결국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 노력 차원의 문제이겠지만, 넓고 깊은 서사와 인물을 써내려가며 소설 세계를 부풀려가는 것은 너무나 무거운 일이었다. 수업 시간에 합평을 하면서도 작품 칭찬을 많이 받는 학우들이 매우 존경스러웠고, 소설 쓰는 것을 생각하면 압박감과 조급함만이 떠올랐다. 좋은 평이 따라다니는 훌륭한 소설가들도 소설 쓰기에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소설 쓰기는 부담감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안다. 소설 분야에 있어서 평소 가장 어려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소설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희미한 점이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혹은 어떤 소설이 가장 깊게 와 닿는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뚜렷하지 않은 점이 현재의 골칫거리이자 숙제이다. 순수 문학이나 소설가를 지망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 소설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세계를 지속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은 적어도 최소한이나마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느리더라도 계속적으로 고민하고자 한다.



 기억하기로는 소설 『노르웨이의 숲』으로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처음 접했다.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아직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 세계의 인상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소설이다. 주인공의 상실감을 중심으로 모든 일들이 흘러가는 이야기이기에, 소설이 남겼던 여운은 그동안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 무겁고 그늘졌다. 모든 일이 허무했고, 세상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소설은 한동안 일상을 힘없이 지내게 만들었다. 불완전한 이들의 불완전한 인생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것이 결국 인생이라는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대부분의 독자들도 비슷한 감정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의 상실감과 세상에 대한 자조적인 태도가 지나치다고 읽혀지기도 했지만 하루키와 동시대에 있는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외설적인 내용이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데, 외설적인 서사와 묘사가 지나치게 자주 등장한다고 느껴져서 더북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문학에서 외설적인 소재와 내용만큼 인간이 가지고 있는 허무함을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는 관점을 접하게 되며, 외설적인 행동과 묘사가 하루키의 소설에서 어떤 기능을 해내고 있는지 이해해볼 수 있었다.



 ‘하루키의 소설은 한 번 이상은 읽기 힘들다’라는 주변 이들의 반응에 공감한다, 하지만 시대의 감정과 인생의 의미를 은유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있어서는 결코 낮을 수 없는 평가를 받을 만한 소설가다.


‘소설가 하루키’는 어떻게 탄생해왔는지에 대해 그의 시선으로 알고 싶었고, 소설가가 아닌 인간 ‘하루키’는 어떤 맥락의 삶을 살아왔을지도 읽어내고 싶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하루키의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에세이인 만큼 인간을 바라보는 소설가 하루키와, 소설가를 직업으로서 바라보는 인간 하루키의 맥락을 관찰할 수 있었다.




 하루키는 프로레슬링의 장면을 끌어다 소설가를 설명한다. 특별히 요구되는 자격 없이 누구나 레슬링 링에 오르기는 쉽지만 링 위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지속적으로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뛰어난 체력과 테크닉,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소설가가 높은 질을 유지하며 오랜 시간동안 글을 써낼 수 있다면, 그것은 소설가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동력 덕분일 것이다. 펜을 들고 노트북을 꺼내면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지만, 글이 나오도록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없다면 소설가로 끝까지 살아남기 힘들다. 글을 쓰도록 하는 동력은 강력할수록 좋지만,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에서는 ‘저속의 기어’를 가져야 한다는 문장이 다가왔다.


의식의 작동이 느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후자의 경우인 것 같다. 무엇이든 서둘러 판단하고 답을 내려버리는 나의 성급함이 글을 쓰는 데에 가장 치명적인 방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계속 고민해보아야 할 거리인 것 같다. 하루키는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했다. 소설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에요’를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이며, 패러프레이즈의 연쇄라고 덧붙였다. 불필요한 말들에 진실과 진리가 잔뜩 숨어있다는 설명은 ‘느린 말’으로서의 소설이 가진 힘을 믿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느린 기어’의 맥락은 훌륭한 이야기꾼이 되지 못해 한탄하고 있는 내게 깊이 와 닿았다. 우선 불필요보다는 효율적임을 추구해온 마음가짐부터 제대로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결혼을 했고, 재즈 바를 운영하며 소설을 썼다는 하루키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평소 하루키를 떠올리면 좋아하는 재즈를 마음껏 음미하며 글을 쓰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금새 연상된다. 어려움과는 거리가 있는 소설가라고 무심결에 생각해왔다. 역시 에세이를 읽으며 하루키가 재즈 바를 운영하면서 가졌던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여러 곤경이 얽혔던 젊은 시절을 풀어낸 이야기는 인간 하루키에 대해 접근해 보도록 해주었다. 작품에 투영되었던 인생과 행복에 대한 그의 성찰이 어떤 식으로 탄생되어 왔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하루키는 일본과 해외에서 12여개의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노벨상의 꽃으로 불리는 노벨 문학상 후보자에 매번 이름이 거두되기도 한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통해 하루키는 문학상이란 형식적인 형태에 그친다고 이야기한다. ‘그 어떤 문학상도 좋은 독자 이상으로 작가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올 수 없다‘고 말한 인터뷰 답변은 문단의 인정보다 독자의 애정과 평가를 중요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독자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지 계속해서 성찰한다. 무엇보다 현역 작가로서 질 좋은 작품을 지속적으로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에 관해 생각하며 문학의 최전선을 향하는 하루키의 고민이 인상 깊었고, 작품 수용자들을 깊게 고려하는 창작자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미 현대문학의 대문호로 자리 잡고 있는 하루키이지만, 행해온 길에 영향 받지 않고 겸손하게 소설가로서의 일을 묵묵히 해내려는 그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상당히 크고 깊은 애정으로 신중하게 문학을 대하는 소설가임을 알 수 있었다.



 하루키의 오리지널리티는 특유의 문체와 전개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하루키의 문체는 건조하면서도 무척 섬세하다. 간결하지만 그만큼 경쾌하기도 하다. 평이하게 읽히면서도 감각적인 문체만으로도 하루키를 매력적으로 느끼기 충분하다. 하루키의 문체는 그가 하던 번역 일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루키는 영어로 쓴 문장을 일본어로 바꿔 쓰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음색을 탐구해 나갔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하루키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서술보다는 사소하고 쉽게 지나칠 만한 소재와 일들에 대해 훨씬 더 풍부하게 서술한다는 특징을 보였다. 이러한 전개는 하루키의 작품을 독창적으로 만들고, 하루키의 마니아층을 만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책에서 가장 집중했던 부분은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하루키의 관점이었다. 흔히 세상이 말하는 ‘하루키스러움’을 그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창작자가 가져야 하는 오리지널리티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만, 거창하게 늘어놓고 있지는 않다. 작품에서 독창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예술을 바라보는 자의 ‘체감’은 독창성의 유무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듣거나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짜릿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이 짜릿한 체감은 모든 예술 작품에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루키가 언급했던 피카소의 그림, 비틀즈와 밥 딜런의 음악 등처럼 주로 혁신성을 가진 예술 작품에서 신선함과 박력을 체감할 수 있다. 독창적인 스릴과 리듬을 가진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고, 후대에 가서도 강력한 짜릿함을 남긴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고전은 파격적으로 등장하고, 빠뜨릴 수 없는 일부로 자리 잡는다. 원천성을 강하게 부여받는 고전은 곧 레퍼런스의 기능을 하며 널리 흡수된다.    



하루키는 창작자가 독창성을 가지기 위한 3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다른 표현자와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의 유무이다. 독자적인 스타일이란 잠깐 보면 그 사람의 표현이라고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스타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업데이트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스타일은 성장해가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독자적인 스타일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일반화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되어 가치판단 기준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 혹은 다음 세대의 표현자의 풍부한 인용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오리지널’의 기본적으로 해당될 수 있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독창성은 그의 ‘자유로움’에서 온다고 털어놓는다.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 즐거움과 자연스러운 감각을 중시하고, 그것이 곧 하루키 소설의 밑바탕을 차지한다. 하루키가 생각하는 독창성이란 바로 자유로운 마음가짐과 기쁨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오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다른 무언가와 비교되면서 생기는 가치라고 생각해왔다. 그러한 것보다는, 위치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를 넓게 퍼뜨리며 단단히 굳어지는 모습 그 자체가 독창성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자유롭게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이 내게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보았고, 창작의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지는 않나 뒤돌아보도록 했다.  



 학기를 다니며 주어졌던 소설 창작에 고통을 느낄 때마다 인터넷에 부유하는 소설가의 인터뷰 기사나 영상을 찾아보았고, 글을 계속해서 써낼 힘을 짜낼 수 있었다. 이 에세이에는 삽입되어있지 않지만 ‘기름에서 튀김을 건져내듯 소설을 써낸다’라고 했던 하루키의 관점이 내게 가장 큰 자극이 되었다. 내면에서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맴돌고 있는 덩어리들을 소중히 정렬해내면, 지켜봐왔던 삶의 덩어리는 글에서 자연스럽게 투영되기 마련이다. 소설이 진행하는 서사와, 서사를 끌고 나가는 크고 작은 문장들에 소설가를 최대한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 소설에 힘을 부여하는 관건이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건축의 방법처럼 소설의 서사와 문장들을 무턱대고 쌓아보기만 했던 나의 글쓰기 방식을 크게 반성했다. 하루키의 소설 작품을 높게 선호하는 편이 아니지만, 운명적으로 이어 나가게 된 직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독자적인 세계를 묵묵히 구축해온 소설가 하루키의 모습, 본받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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